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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예조참의를 거쳐 [[1546년]]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齡) 등과 함께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이때 [[사림파]]를 연루시켜 사림 세력에게도 정치적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정미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정계에서 숙청한다. [[1547년]]에는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을사사화]]에 가담한 공로로 서원군에 봉해진뒤 지중추부사와 [[예조]],[[이조판서]] 특진관 등을 거쳐 [[의정부]][[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진봉하였다. [[1560년]] 그의 권력확장을 경계한 명종은 자신의 처외삼촌인 [[이량]]을 등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축재에 치중하면서 정국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융희 1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 죄적에서 삭제되어 명예회복하였다.**이완용이란 벌레새끼는 하는짓이 참 한결같더라고...** [[조선 중종|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은 그의 9촌 아저씨였다. [[1907년]]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사면 복권되었다.<ref name="soon0804">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ref> 자는 언평(彦平),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波平)이다. [[경기도]] 출신.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