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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권력과 경제로 인한 반란들이 잇달았다. 특히 [[822년]]의 [[김헌창의 난]]과 [[846년]]의 [[장보고의 난]] 등은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신라는 무지막지한 타격을 받는다. 정치에 도전하다 실패한 후 남정네들과 놀아나며 그들에게 권력을 맡기고 말은 것이다. 호족들은 이 틈을 타 성장했고, 889년엔 서라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서 세금을 걷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민란의 발생===
지방 성주(城主) 및 호족의 대두는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으며, 수취체제도 점점 해이해져 갔다. 더구나 신라 말기 귀족의 사치 향락은 늘어갔고, 따라서 비용도 증가했지만, 충족시킬 만한 재원(財源)은 반대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하게 되니(889년), 농민들은 결국 이중 부담을 강요받게 되었다.
 
신라의 성시(盛時)로부터 무거운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고 있던 농민은 유민(流民) 혹은 도적이 되어 질서를 교란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는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구질서에 대한 타격을 뜻한다. 조세의 독촉은 영세한 농민층을 자극하여 농민반란(農民叛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진성여왕]]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영기가 적의 보루(堡壘)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진성여왕은 칙명을 내려 영기를 목베고 나이 10여 세된 우련의 아들로 촌주의 직을 잇게 하였다. 이로써 반란은 겨우 진정되었으나 호족들은 대혼란을 틈타 세를 확장하고 백성들은 도적의 무리로 변해갔다.
 
[[891년]] 10월에는 북원(北原)의 도적 우두머리 [[양길]](梁吉)이 봉기하였다. 그때 [[궁예]]는 죽주의 세력가 기훤에게 부하가 되겠다고 부탁했지만 멸시되어 양길의 수하가 되었다. 궁예를 얻은 양길은 그의 부하 궁예(弓裔)를 보내 1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원의 동쪽 마을 및 명주(溟州) 관내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였다.
 
===견훤의 세력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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