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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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진나라의 두여(杜預)는 《사기》「집해」에서 기자의 무덤(기자총)이 중국 량국 몽현(蒙懸; 현재 [[허난 성|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평양의 유적은 위작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이마이시 류 주장)
*기자의 동래 시기나 주나라에 입조한 시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맞지 않는 모순이 있다.([[이병도]] 주장)
*기자조선 한순근(법무사)은긍정론자들이 근거로 하고있는 《태원선우씨세보》에 기록된가덕왕 기자조선의이전의 역대왕들은왕들은 조작되었다고실제 주장한다왕이 아니라 추존된 왕이라 설명하고 있으므로, BC323년 기후가 조선의 임금이 된 이전의 조선은 기자조선이 아니라 하였다. <ref>한순근,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http://home.megapass.co.kr/~hsg1000/a60e.htm]</ref>
* 정인보는 기자의 기(箕) 자는 임검의 검(儉) 자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발음이 변한 것이며, 검(儉)과 기(箕)는 모두 높다(高) 혹은 윗사람(上)의 뜻이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 환도성에 있던 기산(箕山)이란 일명 기구(箕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검재"를 한역(漢譯)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떠돌이 중국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으로 이민하여 들어오면서 그들에 의하여 날조되었고 사대사상이 강한 중세 조선에 이르러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ref>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 정인보 지음, 박성수 편역, 2000</ref> 또한 그는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 곡주 협계현조를 들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협계현을 단계(檀溪, 단군골)라 고친 것은 이 곳에 기산(箕山), 즉 "검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