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중: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Jki321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박의중'''('''朴宜中''', [[1337년]] ~ [[1403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본관은 자허[[밀양 박씨|밀양]](子虛密陽), 초명은 박실(實)이며, 밀성자는 자허(密城子虛), 사람이다.호는 정재(貞齋)이다.
 
== 생애 ==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ref>『고려사』 「선거지」</ref>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이 되었고, 거듭 승진해 헌납(獻納)과 사예(司藝)를 거쳤다.
아버지인 판도총랑(版圖摠郞) 박인기(朴仁杞)는 [[충숙왕]](忠肅王) 2년([[1315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티베트]]로 유배된 [[충선왕]](忠宣王)을 유배지까지 시종한 공으로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에 봉해졌다. 박의중의 숙부 박인간(朴仁幹)은 [[충목왕]](忠穆王)의 스승이었다.<ref>보통 이색의 문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색과는 사재에서 함께 수학한 것으로 보아 선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ef>
 
[[우왕]](禑王)조에 문하사인(門下舍人)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승진했는데, [[1382년]](우왕 8) 정리(鄭釐)와 함께 우왕의 행실에 대해 상소로 간언했으나 회답을 받지는 못했다.
26세 때인 [[공민왕]](恭愍王) 11년([[1362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의직장이 된 뒤에 여러 직을 거쳐 동왕 16년([[1367년]])에 이색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이숭인]] 등과 함께 성균관 학관을 겸직하였는데, [[정도전]]은 포은봉사고서에서 "일찍이 목은 이색 선생이 성리학의 맹주가 되어 유학을 완성하려 할 때 정몽주를 평하여 '호방하고 탁월하다' 하였고, 박의중의 평하여 '치밀하고 정절하다'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이 목은 선생을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요, 목은이 두 사람의 인재를 얻은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유학의 흥기에 이미 박자허가 시작에 참여 했으니 마땅히 마치는 것도 그와 함께 하겠다'"라고 하였다.(《삼봉집》) 성리학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박의중의 비중이 이처럼 큰 것임에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왕권 교체기에 정치인이 아니라 순수한 학자였기 때문에 역사에 묻혀버렸다고 할 수 있다.
 
[[1385년]](우왕 11)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옮겼다가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옮겨 재추의 반열에 들었고, [[1388년]](우왕 14)에 명에 사신으로 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여 관철시켰다.
[[우왕]](禑王) 때 문하사인에 제수되었고, 좌사의대부로 승진하여 우왕의 방자무도함을 지극으로 간하였다. 이후 성균관대사성으로 옮겼다가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된 후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사신으로 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은 대개 금은과 토산물을 가지고 가서 채색 비단이나 자질구레한 물품들을 사오는 사무역을 하였는데, 이를 보고 중국에서는 “고려 사람은 중국에 공물을 바친다는 핑계를 내세우고 오직 장사에만 마음이 팔려 있다.”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따라서 명의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이 포(布)를 요구하자 박의중은 행장을 털어 보여준 후 입고 있던 모시옷을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 서현이 그의 청백함에 탄복하여 예부관(禮部官)에게 보고하자 홍무제가 예부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박의중에게 잔치를 베풀고 철령위를 세우자는 계획도 중지시켰다. 이후 [[창왕]](昌王)이 즉위하여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이 때 그의 청렴함에 탄복한 요동호송진무(遼東護送鎭撫) 서현(徐顯) 덕에 황제와 접견할 수 있었고, 황제에게 후대를 받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년]]) 밀직제학으로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고, 미신과 같은 풍수설을 가지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다는 것은 부당함을 설파하였다. 이어 성균관대사성 겸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2년 뒤인 동왕 4년([[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는 정도전, 정총과 함께 《고려국사》 편찬을 명했으나, 박의중은 사료만 남기고 외가인 [[김제]]로 떠나버렸다. 조선 태종이 즉위해 검교참찬의정부사의 직을 내리며 불렀지만 받지 않았고, 동왕 3년([[1403년]]) 김제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
 
이 공으로 [[창왕]](昌王)이 즉위한 후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1390년]](공양왕 2) [[김사형]](金士衡)과 함께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다.
이색이 정재기를 지었고, 그의 후학인 권근이 태종 1년(1401년) 스승을 위하여 '자허설'을 지었다. 그가 죽은 뒤 동향의 제자 [[변계량]]이 만장을 들었고, 성리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권근이 제문을 지어 그를 떠나 보냈다. 성종 때 좌리공신 밀산군 박거겸이 손자. 저서로는 《정제일고》가 있고, 시호는 문경이다.
같은 해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가 있자, 왕이 박의중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 때 그는 참위(讖緯)의 학설이 허황되고, 당시의 민심이 불안함을 역설하며 이에 반대했다.
 
얼마 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ref>『고려사』 「박의중전」</ref>, 고려가 망하자 숙부 박인익(朴仁翊)과 함께 벽골호(碧骨湖)에 은거했다.<ref>조모가 김제(金堤) [[김제 조씨|조씨]](趙氏)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ref>
박의중은 《고려사》 열전에 보일 정도로 고려조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가 살아간 시대는 대외적으로 원명(元明) 교체기였고, 대내적으로는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는 격변기였다. 당시 고려는 오랜 기간에 걸친 무신정권의 하극상과 원의 간섭으로 국가적 기틀이 뿌리채 흔들렸고, 대내외적으로도 정치적 대응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인이 아닌 순순한 학자로써 박의중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조선 태종|태종]](太宗)이 그를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로 임명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병이 낫지 않아 취임하지 못했다.
== 참고 문헌 ==
 
* 《[[고려사]]》
[[1403년]](태조 3) 향년 67세로 졸했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f name=a>『박의중 신도비』</ref>
* 《[[태조실록]]》
 
* 《[[태종실록]]》
== 기타 ==
* 《[[정제일고]]》
이색이 정재기를 지었고, 그의 후학인 권근이 태종 1년(1401년) 스승을 위하여 '자허설'을 지었다. 그가 죽은 뒤 동향의 제자 [[변계량]]이 만장을 들었고, 성리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권근이 제문을 지어 그를 떠나 보냈다. 성종 때 좌리공신 밀산군 박거겸이 손자. 저서로는 정제일고있고, 시호는 문경이다있다.
* 《[[삼봉집]]》
 
박의중은 고려사 열전에 보일 정도로 고려조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가 살아간 시대는 대외적으로 원명(元明) 교체기였고, 대내적으로는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는 격변기였다. 당시 고려는 오랜 기간에 걸친 무신정권의 하극상과 원의 간섭으로 국가적 기틀이 뿌리채 흔들렸고, 대내외적으로도 정치적 대응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인이 아닌 순순한 학자로써 박의중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 가족 관계 ==
* 증조 - 박함(朴諴)<ref name=b>『박화 묘지명』</ref> :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증 예빈윤(禮賓尹)
** 조부 - [[박화]](朴華, [[1252년]] ~ [[1336년]])<ref name=b/> :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상호군(上護軍)
*** 아버지 - 박인기(朴仁杞) : 판도총랑(版圖摠郞)
*** 어머니 - 미상
**** 첫째 부인 - 별장(別將) 이수창(李壽昌)의 딸<ref name=a/>
**** 둘째 부인 - 대제학(大提學) 한탑(韓塔)의 딸<ref name=a/>
***** 장남 - 박경빈(朴景贇) : 현감(縣監), 증(贈) 호조판서(戶曹判書), [[박거겸]](朴居謙)의 아버지
***** 차남 - 박경무(朴景武)
***** 3남 - 박경문(朴景文)
***** 사위 - [[이안우]](李安愚, ? ~ [[1424년]])<ref>『씨족원류』</ref> : 판진주목사(判晉州牧使)
'''※'''자녀들은 어머니가 미상이다.
 
== 같이 보기 ==
줄 30 ⟶ 46:
[[분류:1337년 태어남]]
[[분류:1403년 죽음]]
[[분류:밀양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