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189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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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면직물과 메리야스를 제조 판매하던 회사인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주식 340주를 매입하고, 그해 송고실업장의 재단이사의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그해 [[9월 12일]] 송고실업장이 [[송도고등학교]] 부속기관에서 독립하고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으로 설립될 때 [[공성학]] 등과 함께 취체역의 한 사람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감사역에는 [[백낙준]], 최선익 등을 선정하고 대표직은 김정호에게 양보하여 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이순신]]의 사당과 위토가 매각위기에 처하자 [[윤치호]]는 [[이충무공 유적지]] 보존 사업을 추진하였다. 윤영선은 여기에 10전을, [[윤일선]]은 20전을 각각 기부하였다.<ref>"충무공유적보존문제로 추모의결정체성 금답지", 동아일보 1931년 7월 22일자 6면, 사회면</ref> [[1932년]] [[5월 25일]]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에 설립된 자동차 운수업과 운송업을 겸하는 평원운송(平元運送) 주식회사의 감사로 선임되었다. 32년 9월 23일 평양부 신창리의 기생권번조합인 기성권번조합(箕城券番)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1932년]] 송도중학교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송도소학교]](松都小學敎)의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자금 지원이 줄어들어 운영난에 처한 개성 제2송도보통학교의 재정문제를 구제하였다. 바로 [[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의 기금을 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