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189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웹사이트= [http://www.yunposun.com/history.htm 해평윤씨 홈페이지]
}}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과 양잠업을 하였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농림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아일보사]] 개성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윤치호]]와 중국인 [[마애방]]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 [[윤원선]] 등과는 재종간이며,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한 [[방상훈]]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해평으로 호는 오당(梧堂), 초명은 용성(龍成), 자는 용성(龍成)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직전까지 [[경기도]] [[개성]]과 [[개풍군]] 등지에 대규모의 낙농, 목축업을 경영하였으며, [[송도학원]] 재단 이사로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무렵에는 농림부장관과 무임소장관을 지내고, 휴전 이후에는 교육사업과 4H클럽 활동, [[로터리 클럽]] 활동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송도학원]]의 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인 [[윤치호일기]] 보존을 위해 일부 내용을 [[미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택배로 우송하였다. 이로써 윤치호 일기 중 일부는 [[한국전쟁]]의 화를 모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다.
63번째 줄:
[[1924년]] [[11월 29일]] 새벽 2시경, 종로방 견지동 68번지 윤영선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양복 외투와 현금 50원을 비롯한 3백원어치의 금품을 절도당했다.<ref>"윤씨저에 절도", 동아일보 1924년 12월 29일자 2면, 사회면</ref>
 
[[1925년]] [[9월]] [[송도고등학교]]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4월 17일]]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18번지에 [[동아일보사]] 개성지국이 개설되자 윤영선은 동아일보 개성지국장에 임명되었다.<ref>"社告", 동아일보 1925년 04월 17일자 03면 09단</ref> 이후 그는 [[1945년]] [[9월]] 군정이 주둔할 때까지 [[동아일보]] 개성지국의 일도 맡아보았다.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1927년]] 다시 [[양산군]] [[원동공립보통학교]]의 훈도가 되었다가 [[1929년]]까지 재직하고 그만두었다.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파일:Yun Chi-ho's Family 02.png|thumb|right|160px|숙모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윤영선, 넷째 줄 가운데, 색동옷을 입은 [[윤치소]]의 뒤측 오른편, 한진숙의 바로 뒷쪽열은 아버지 [[윤치호]],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는 6촌 동생 [[윤보선]], 셋째 줄 가운데는 당숙 [[윤치소]], 그 옆은 종조모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당숙모 [[이범숙]], 다섯째 줄 오른쪽 끝은 당숙 [[윤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