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 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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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의 결말 ==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된 진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진나라에는 없었다. 결국 백기는 끔찍한 선택을 했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이 조를 나누어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곳에 군사들을 묻어버렸으며<ref>이 때, 진중에 있던 어린 아이들은 전부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그 수는 250명 정도였다고 한다. 나머지는 전부 매장했다.</ref>, 전투 후에 취한 조나라 군사들의 수급을 모아 영루(營壘)에 쌓게 하였다. 백기는 이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이 산 꼭대기에 지은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 불렀다<ref>2008년 중국에서 장평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굴한 결과, 실제로 40여만에 달하는 인골이 발견되었고, 이 결과로 사서의 기록이 정확한 기록이었음이 밝혀졌다. http://bbs.sssc.cn/viewthread.php?tid=436012&extra=&page=1</ref>. 훗날 한 시인이 이 참담한 장면을 다음의 시로 지었다 전한다.
 
{{인용문2|'''高臺八尺盡頭顱'''<b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