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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己卯士禍)는 [[1519년]]([[조선 중종|중종]] 14) [[음력 11월]]에 [[남곤]](南袞), [[심정 (1471년)|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조선 중종|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핵심인물을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정암 조광조|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 [[심정 (1471년)|심정]], [[김전]], [[홍경주]],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
 
[[조선 중종|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려들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1471년)|심정]], [[정광필]], [[안당]]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일명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무오]]·[[갑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 학자들은 거의 몰살당하여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 중종|중종]]은 연산군의 악정(惡政)을 개혁함과 동시에 [[중종 반정]] 이후 무한대로 축재와 권력남용을 하는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때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정암 조광조|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가장대한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安塘)도 그를 추천하였으므로 곧장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전후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삼대(三代)<ref>[[하나라]]·[[은나라]]·[[주나라]]</ref>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김종직]]이 출사한 이래에이래 계속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사림파]]의 뜻과도 부합되었으므로 이들은 [[조선 중종|중종]]의 영입 노력을 적극 수용하였다.
 
=== 왕권 강화 ===
[[중종 반정]]으로 공신이 된 [[박원종]], [[유자광]], [[유순정]], [[성희안]], [[홍경주]] 등은 권력을 장악 무한대로장악하여 세력을 무한대로 확장했고, 이들 공신들의 권력 남용은 왕권을 넘보는 수준까지수준에까지 도달했다이르렀다.
 
왕권까지 우습게 보는 도를 넘어선 [[훈구파]] 공신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할 필요성을 느꼈던 [[조선 중종|중종]]은 새로운 대안 세력을 모색하게 된다. 또, [[중종 반정]] 이후 신료들 사이에 왕을 선택할 수 있다(택군)는 사상이 은연중에 조성되어 [[조선 중종|중종]] 등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 훈구 및 구 관료와의 갈등 ===
[[사림파]]가 [[성리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한중시한 나머지 고려 이래 수 백 년간 장려하여 온 사장(詞章)<ref>시와 산문</ref>의 학을 배척하자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詞章派)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혁파하려 하였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남곤]], [[심정 (1471년)|심정]], [[정광필]](鄭光弼) 등 보수파의 훈구재상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정광필]], [[안당]] 등은 [[사림파]]에 대단히 우호적이었고 사림파 발탁에 힘을 기울였지만 사림인사들의사림 인사들의 지나친 공세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또한 같은 사림으로 [[김종직]]의 문인의 한사람이었던 [[남곤]] 역시 이들의 과격한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훈구 재상으로서재상으로 [[정암 조광조|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靖國功臣)<ref>[[중종 반정]] 공신</ref>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ref>[[심정 (1471년)|심정]](沈貞)도 포함</ref>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勳臣)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에 나섰으니,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의 하나였다.
 
그 위에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정암 조광조]] 등의 혁신적인 정치를 후원하였으나 [[조광조|정암 조광조]]의 정치가 혁신성을 잃고 도학적(道學的) 언행만을 되풀이하자 점차 총애를 거두었다. 실록을 따르면 이미 기묘사화 일이년 전부터 이미 중종의 총애가 [[조광조|정암 조광조]]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조광조|정암 조광조]]는 [[중종]]이라는 후원자가 없자 점차 정계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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