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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전 과정 ==
고려의 교육제도는 [[고려 태조|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무력적 통치에서가 아니라 문치주의에 입각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하면서 [[호족]](豪族)과 백성을 회유·통제하려 하면서 시작·본격화되었다.
[[고려 광종|광종]] 때의 [[과거제도]]의 창설은 교육제도의 필요성을 더욱 고조시켜 관리의 양성기관 또는 과거의 준비기관이 나타났다. 고려의 교육제도는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국자감 (고려)|국자감]]으로, 후자는 [[12공도]](十二公徒)로 각각 대표된다.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다한 것은 관학으로서, 지방의 [[향학]](鄕學)보다도 중앙의 국자감이 고려시대의 교육제도를 대변하고 있다. 국자감의 과목은 국자학·태학(太學)·4문학(四門學)과 율(律)·서(書)·산(算)의 잡학(雜學)으로 구성되어 이른바 경사6학(京師六學)이라 불렸다. 그 중에서 전기 3학은 경학과 문예를, 잡학은 전문기술을 수업하여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목을 띠었다.
 
[[고려 문종|문종]] 때에는 [[최충]](崔沖)의 9재학당(九齋學堂) 이후 12공도라는 사학이 번창해지면서 관학을 압도하였다. 특히 12공도는 매년 여름이면 승방(僧房)을 빌어서 유학강습을 하였으며, 유교가 교육기관으로서 불교의 사원을 이용한 것이다.
 
 
[[고려 예종|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하고, 전문적인 7재(七齋)와 양현고(養賢庫)라는 육영재단을 두고 교육을 강조하였다. 특히 7재는 경전을 강습하는 곳이었는데, 과거준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배가시켰으며, 도서관 겸 학문연구소인 청연각·보문각(寶文閣) 등을 두어 교육에 대한 국가의 관심도를 높였다. 그 후 [[고려 충렬왕|충렬왕]] 때에 [[안향]](安珦)의 건의로 ‘국학’이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되었고, 섬학전(贍學錢)과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을 두어 관학을 혁신·부활시켰다. 이때를 전후하여 [[주자학]]이 들어와 성균관은 관리양성의 전문기관으로서, 또 학문연구의 전당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점차 학문연구에 중점을 두면서 조선시대의 성균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려 광종|광종]] 때의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