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고려-거란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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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인용문|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개성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이다. 만약 다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여기서는 거란을 말한다.)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하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은 우리나라 땅이지만 여진이 점거하였다. 이들이 교활변덕이 많아 길을 막아서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조빙을 못하게 됨은 여진 탓이다.<ref>《[[고려사절요]]》권(券) 2, 성종 문의대왕 (成宗文懿大王)</ref>}}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 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