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와디스와프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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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일라(야기에우워)는 [[리투아니아]]의 대공 알기르다스([[:lt:Algirdas]])의 12 아들 중의 하나로 [[빌뉴스|빌노]]에서 태어났다. [[137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야기에우워의 대공 칭호는 그의 일가에 의하여 논의되었다. 그의 삼촌 케시투티스(케이스투트)의 살인으로 투옥되었고, 이 대공으로서 통치 기간 중에 [[튜턴 기사단]]의 후원을 받은 그의 사촌 비타우타스(비톨드)와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다.
 
[[1384년]] [[헝가리]]로부터 영토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만할 강한 통치자를 원하였던 [[폴란드]]의 [[귀족]]들이 요가일라에게 어린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 여왕|야드비가]]를 신부감으로 주면서 리투아니아를 [[기독교]]화시키고 폴란드와 통일하는 분위기에서 그녀의 왕좌를 나누도록 하였다. 요가일라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계획을 숙고하였다.
 
[[1386년]] [[2월 2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이름으로 폴란드 국왕 자리에 올랐고, 15일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으면서 3일 후에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3월 4일]] [[크라쿠프]]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리투아니아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도 하였다.
 
[[1399년]] 여왕이 사망할 때까지 자식없이 살던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의 지휘적 존재가 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그와 비타우타스 사이에 더 나아가의 분쟁을 성공적으로 이용하였으나 [[1401년]] 빌노 조약을 맺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공동적 외교 정책에 의하여 영속적으로 통일하는 상태에서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의 최고 공작으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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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족은 자기들의 영토 확장에 결정적 확인의 값으로 [[1399년]] 보르스칼라 강의 전투에서 비타우타스를 꺾었다. 이것은 브와디스와프에게는 두배의 승리였다. 타타르족이 약해지자, 더욱 강력한 리투아니아의 완전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는 비타우타스의 노력들이 그들의 패배와 함께 끝냈다.
 
루테니아는 [[1387년]] 이른 세월에 헝가리로부터 회복되었고, 폴란드는 예속의 [[몰다비아]]의 황태자를 만드는 데 강한 힘을 키웠다. [[1412년]] 브와디스와프는 기부금의 교환으로 튜턴 기사단에 협력했던 헝가리와 타협을 이루었다. 계속적으로 그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시그문트에 대항하는 [[얀 후스|후스]]교도들을 성원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력을 조심성있게 다루었다. 그래서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의 좋은 관계와 함께 자신의 군림을 끝냈다.
 
국내 정책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아직도 이교도들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지역들을 활기있게 기독교화시켰으나 그가 약속한 대로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합병할 수 없었고, 비타우타스를 사실상으로 주권자로서 행하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1430년]] 비타우타스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는 아직도 그의 권위를 리투아니아에서 복위할 수 없었고, 내전 후에 비타우타스의 동생이 리투아니아의 총독이 되었다.
 
폴란드에서는 귀족 사회가 그 직위에서 강화되었으며, 특히 브와디스와프의 군림 기간 후기에 [[공민]]을 자기 쪽에 두는 데 이길 수 없었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귀족들에게 대등할 활용을 못하였다.
 
[[1434년]] [[6월 1일]] 그루데크(현재 [[우크라이나]] [[르부프]])에서 사망하였다. 아들로 [[브와디스와프 3세]]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둘째 [[카지미에시 4세]]가 뒤를 이었다.
 
== 바깥 고리 ==
{{Commons category위키공용분류|Wladislaus II of Poland}}
* {{언어고리|en}} [http://www3.dcs.hull.ac.uk/cgi-bin/gedlkup/n=royal?royal05545 "Wladyslaw II" at the Directory of Royal Genealogical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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