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57번째 줄:
 
=== 이후 10년간의 정세 ===
마라톤 전투이후 10년간 그리스의 정세는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때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 경기]]에 참가했는데 올림픽 경기에는 순수 그리스인들만 참가 할참가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레오니다스]]가 권좌에 올랐다. 아테나이는 다가오는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에 나섰다. [[기원전 488년]] [[도편추방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페르시아에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추방시켰고 아테나이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강경민중파와 [[아리스티데스]]의 온건귀족파로 나뉘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군비증강에 따른 자력방위론을 주장하는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활용하여 정적인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고 정권을 잡은 후 광산수익을 국고에 귀속시키고 군비증강에 힘썼다. 페르시아의 재침공이 점차 현실화 되자 북부의 일부 그리스 국가는 페르시아에 항복했하고 페르시아의 편으로 붙었지만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몇몇 그리스 동맹국은 서로 반목을 그치고 페르시아의 위협 앞에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한편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재침공을 위해 준비에 나섰으나 때마침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때문에 준비가 늦어졌고 [[기원전 485년]] 다리우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제위에 올랐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고 대략 4년에 걸친 전쟁 준비 이후 그리스 공략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