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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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는 두 번 결혼했다. [[1185년]]부터 [[1187년]]까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키예프 공국|러스]]의 왕자 [[유리 보골류프스키|유리]]였는데, 그녀는 그와 이혼했으며 차후에 그의 쿠테타 시도를 진압하고 국가에서 추방했다. [[1191년]], 타마르가 선택한 그녀의 두 번째 부군은 [[알라니아]]의 왕자 [[다비트 소슬란]]으로,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조지아의 게오르게 4세|게오르게]]와 [[조지아의 루수단|루수단]] 이 두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은 조지아의 왕위를 연속으로 계승한 군주들이다.<ref name="CMH-623">Toumanoff (1966), "Armenia and Georgia", p. 623.</ref><ref name="Allen-104">Allen (1932), p. 104.</ref>
 
여성 통치자로서의 타마르의 역할이 결합된 정치적 군사적 성공들과 문화적인 업적들의 기간과의 타마르의 유대는 조지아의 예술과 역사적 기억에서 그녀의 이상화와 로마화로 이어져 왔다. 그녀는 조지아의 대중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으며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거룩하고 옳은 여왕 타마르로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5월 14일]](구 5월 1일)이다.<ref>Machitadze, Archpriest Zakaria (2006), [http://www.pravoslavie.ru/enarticles/070521130132 "Holy Queen Tamar (†1213)"], in [http://www.pravoslavie.ru/enarticles/070306192614 ''The Lives of the Georgian Saints''].''pravoslavie.ru''. Retrieved on 2008-07-21.</ref><ref>{{언어링크언어고리|el}} ''[http://www.synaxarion.gr/gr/sid/2842/sxsaintinfo.aspx Ἡ Ἁγία Ταμάρα ἡ βασίλισσα].'' 1 Μαΐου. ΜΕΓΑΣ ΣΥΝΑΞΑΡΙΣΤΗΣ.</ref>
 
== 유년기와 왕위 등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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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건 군주 ===
[[파일:Tamar's fresco at Betania.jpg|thumb|left|150px|타마르 여왕, 베타니아에 있던 13세기 초반의 프레스코화 조각]]
타마르 시대의 정치와 문화적 위업들은 그녀 이전의 조지아 역사에서는 선례가 없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업적들은 깊고 복합적인 과거의 역사와 선대가 그 뿌리를 이뤘다. 타마르가 성취한 업적들은 대부분 그녀의 증조부 다비트 4세(즉위. 1189~1125)의 개혁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좀 더 간접적으로는 11세기의 처음 10년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왕국들과 공국들의 정치적인 통합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타오의 다비트 3세|다비트 3세]]와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의 단합된 노력이 기반이 되었다.<ref>Rapp (2003), p. 413.</ref> [[중세 시대]], 그녀의 통치 기간에서 마지막 해 쯤에, 조지아 왕국의 국력과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타마르의 왕국 영역은 북부와 중앙 아르메니아에서의 충성스러운 자차리아드 관리 체제와 봉신인 시르반과 동맹인 트레비존드를 형성하므로, 북쪽의 [[볼쇼이캅카스 산맥|대캅카스]] 산마루에서 부터 남쪽의 [[에르주룸]]까지 그리고 북서쪽의 [[지기 (조지아)|지기]]에서 동남쪽의 [[간자]]까지 확장되었 판-팝카스 제국을 이뤘다. 동시대의 조지아 역사가는 타마르를 "폰투스의 바다(흑해)에서 부터 [[고르간]]의 바다([[카스피해]])까지, [[스페르 (조지아)|스페리]]부터 [[데르벤트|데르벤드]]까지 그리고 [[하자르족|카자리아]]와 [[스키타이|스키타이아]]의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모든 영토의 주인이라며 격찬했다.<ref>{{언어링크언어고리|ka}} Shengelia, N., [http://www.nplg.gov.ge/ic/DGL/work/SIN/sin%203+/nawili%201/5/2.htm#_ftnref75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გარეო პოლიტიკური ურთიერთობანი თამარის მეფობაში] ("Foreign Relations of Georgia during the reign of Tamar"), in Melikishvili (1979).</ref><ref>Salia (1983), pp. 177–190.</ref>
 
국왕의 칭호는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 칭호는 조지아 왕국 영역의 전통적인 구획들을 좌지우지 했을 뿐만아니라, 이웃한 영토들에서도 조지아의 제왕 패권을 강조하는 새로운 성분을 포함했다. 따라서, 주화들과 헌장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타마르는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압하스 왕국|압하지아]],<ref>중세 시대에 "압하지아"와 "압하지아인"이라는 용어는 보통 서부 조지아 전역에서 모든 실제적인 용도들이 포함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는 15/16세기에 조지아 왕국이 분열된 후에야, 오늘날 [[압하스 공화국|압하지아]]와 그 지역에 사는 [[:en:Abkhaz people|민족 집단]]에게 한정되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사용되었다. [[:en:Vasily Bartold|Barthold, Wasil]] & [[:en:Vladimir Minorsky|Minorsky, Vladimir]], "Abkhaz", in ''[[:en:The Encyclopaedia of Islam|The Encyclopaedia of Islam]]'', vol. 1, 1960.</ref> [[카르틀리|카르트벨리아]],<ref>"카르트벨리아인"은 현시대의 조지아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자칭하는 용어이며, 본래는 [[고전 고대]]와 비잔티움 자료들에서 조지아의 [[카르틀리]]-[[캅카스 이베리아|이베리아]]의 중앙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9세기 경에, 조지아의 문학가들은 "카르틀리"의 의미를 종교, 문화, 언어에 의해 하나가 된 중세 조지아의 다른 지역들까지 넓혔다. Rapp (2003), pp. 429–430.</ref> [[아르란]], [[카케티]], [[아르메니아인]]들의 왕들 중에 왕이이며 여왕들 중에 여왕이시고, [[시르반샤흐]]와 [[샤한샤흐]]이시며, 모든 동방과 서방의 [[전제 군주]]이시고, 세계와 신앙의 영광이시며, [[메시아]]의 투사이신 분"으로 확인된다.<ref>Lordkipanidze (1987), p. 157.</ref><ref>Eastmond (1998), p. 135.</ref><ref>Rapp (2003), p. 42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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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가 죽은 이후에, 그녀가 묘소에 대한 수 많은 전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가운데 하나는 타바르가 갈레티의 비밀 [[니치 (건축)|니체]]에 묻혔는데, 그 이유는 성스러운 무덤을 더럽히려는 그녀의 적들로부터 묘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타마라의 시신과 유물들이 어쩌면 멀리 떨어진 성지에 있는 어느 곳으로 이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프랑스]]의 기사 구일라우에 데 보리스가 [[팔레스타인]]에서 작성해서 [[로마 가톨릭 브장송 대주교 관구|브장송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듣기를 조지아의 왕이 어마어마한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미 [[사라센]]의 많은 도시들을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보고에 따르면, 그는 모친인 일생 동안 성지 순례를 할 수 없었던 "강력한 여왕 타마르"(''레기나 포텐티스시마 타마르'')의 시신을 이송하고 있었고, 유증된 그녀의 시신은 [[성묘 교회|성묘]] 근처에 묻혔다고 했다.<ref>Pahlitzsch, Johannes, "Georgians and Greeks in Jerusalem (1099–1310)", in Ciggaar & Herman (1996), p. 38, fn. 17.</ref><ref>Vateĭshvili (2003), pp. 135–140.</ref>
 
20세기에, 타마르의 묘소에 대한 탐구는 널리 대중들의 관심사가 됐을 뿐만아니라, 학자들의 연구 소재가 되었다. 조지아의 작가 [[그리골 로바키제]]는 타마르에 대한 1918년에 발간한 에세이에서 "여태까지, 아무도 타마르의 묘소가 어디있는지 몰랐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없다. 그녀의 묘소는 조지아인들의 마음 속에 있다. 조지아인의 인식 속에 있는 한, 그 곳은 무덤이 아니며 활짝 펴서 시들지 않은 꽃인 타마르 대왕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꽂병이다."라고 하였다.<ref>{{언어링크언어고리|ka}} Robakidze, Grigol (13 May–15, 1918), "[http://www.amsi.ge/istoria/gr/Tamar.html თამარ]" ("Tamar"). ''Sak'art'velo'' '''90'''/'''91'''.</ref> 정교회 아카데미의 견해로는 타마르의 묘소가 여전히 겔라티에 있다고 보는데도 불구하고, 1920년에 [[에크브티메 타카이슈빌리]]와 함께 시작된 일련의 고고학적인 연구에서도 수도원에서 그 묘소의 위치를 찾는데 실패했다.<ref>Vateĭshvili (2003), p. 135.</ref>
 
== 유산과 대중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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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commons cat위키공용분류|Tamar of Georgia}}
* [http://www.zeno.ru/showgallery.php?cat=1971 Georgian coins minted in Tamar's reign], Zeno.Ru&nbsp;– Oriental Coins Datab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