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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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한국 정부는 [[1973년]] [[8월 25일]] 한국 대사관의 이상진 정무담당참사관을 통해 '일본 국회 등의 논의나 신문의 보도 등에서 한국 정부의 직원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듯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다나카 법무성 장관은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매우 괘씸한 변명이다"라고 지적하며, '한국 정부의 그러한 태도는 우리 국회에 대한 중대한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주일공사 김재권은 주일 대사관 일등 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김대중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직접 납치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행동대원’은 젊은 말단직원들이 아니었다. 당시 직급으로 윤영로와 한춘은 이사관인 2급 갑, 홍성채·김동운·유영복은 부이사관인 2급 을, 유충국만 서기관인 3급 갑으로 모두 상당히 고위직에 이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ref>{{서적 인용|url=|제목=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 혼돈 속의 실행 준비|성=한홍구|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김대중의 납치과정에서 가장 의혹을 받은 인물이 양일동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외교관 여권을 전달받고 출국한 것으로 밝혀졌다.<ref>{{서적 인용|url=|제목='김대중 납치사건과 중앙정보부', <김대중납치사건의 진상>, 291쪽.|성=김경재|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양일동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평소 왕래가 있던 김대중 납치 현지 책임자 김재권 공사가 양일동에게 끈질기게 접근했다. 양일동이 김대중에 비판적인 입장인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달라붙었다. 양일동이 퇴원하여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실에 투숙한 것은 김재권이 방 세 개를 얻어 그 중에 2212호실을 양일동에게 주고, 나머지 방에는 납치범들의 ‘거사용’으로 사용하였다. 양일동이 납치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같은 엄청난 사건을 목격하고도 40분 내지 1시간 후에야 그것도 일본 경시청이 아닌 김재권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는다. <ref>{{저널 인용|제목=후광 김대중 평전/[13장] 토막살해 수작음모 도쿄납치사건 [87회] 토막살해 위해 배낭 등 준비|저널=|성=김상웅|이름=|url=|날짜=|출판사=}}</ref>
 
정보부원들은 원래 양일동이 묵는 2211호의 옆방인 2210호실을 예약했는데 마침 앞방인 2215호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방에 나눠서 요원들이 대기했다. 그중 2215호에 우연히 이북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게 된 것은 복도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통일당 김경인 의원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호실에 있던 납치대원들이 급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호실에 있던 감시조가 뒤처리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시조는 2210호실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와 버렸다. 너무나 어설펐지만 어쨌든 납치는 성공했고, 중앙정보부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도쿄를 빠져나와 무사히 공작선 용금호가 대기중인 오사카에 도착하여 김대중을 국내로 실어 보냈다.
 
이희호는 양일동이 일본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김대중에게 알리며 그를 너무 믿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양일동 씨, 김경인 씨 오늘 일본으로 떠난대요. 경인 씨가 (김)종충 씨 전화번호 가지고 갔으니까 연락될지 모르나 양 씨도 요즘 당신 말 많이 하고 있데요. 그러나 어느만큼 믿느냐는 생각할 필요 있어요. 양 씨도 오늘의 현실을 보고 당신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니까 생각하는 거지, 이 나라 생각보다는 자기 이해를 더 앞세워 생각함으로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73년 7월 13일) 그리고 호텔에서의 행동에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희호의 회고록을 들춰보자. "나는 신문 보도를 통해 김 의원과 양 총재가 납치 당시 그곳에 있었던 것을 알고 매우 섭섭했다. 왜 곧 호텔 측에 알려서 괴한이 남편을 납치해 갔다고 전하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소리 질러 옆방에 들리도록 못했을까." <ref>{{뉴스 인용|url=|제목=DJ 납치, 박정희가 직접 지시했다|성=김택근|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ref name=":0">{{뉴스 인용|url=|제목=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자기 손엔 피를…|성=한겨레|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어 [[1973년]] [[9월 5일]], [[일본 경시청|경시청]]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 야당 측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 측은 "지금은 진상 규명이 첫째로, 현 단계에서는 주권 침해라고 볼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한국과의 관계를 변경할 생각은 없다"라고 답변했다.
 
[[1974년]] [[10월 25일]]에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수사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며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 요청에 따라 [[1975년]] [[7월 22일]]에 수사결과에 대해 다시 회답하면서, 사건 후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어 [[1974년]] [[8월 14일]]에 수사를 중단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했으며, 이후 도쿄에서 그의 언동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보여 공무원의 지위를 박탈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ref name=":0" />
 
일본 정부는 이러한 회답에 [[1975년]] [[7월 23일]]에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외무성|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의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다음날 귀국했다. 귀국 즉시 미야자와 외무성 장관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결말이 지어졌다고 발언했다.
* [[이후락]]
* [[김영삼]]
* [[양일동]]
* [[장준하]]
*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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