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45번째 줄: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ref name="ch10">최종덕, 10쪽.</ref>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ref name="ch10"/>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ref name="ch10"/>
 
[[조선 태종|이방원]]이 옹립한 [[조선 정종|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ref name="ch10"/>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ref name="yi59">이상해, 59쪽.</ref> 1408년 태조는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ref name="yi59"/>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ref name="ch10"/>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ref name="ch10"/>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ref name="ch10"/><ref>신하들이 태조의 뜻을 근거로 들며, 경복궁에 거처할 것을 청하자, 태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ca_11110004_002&tabid=k 태종실록 11년 10월 4일])<br />{{인용문|“내가 어찌 경복궁(景福宮)을 허기(虛器)로 만들어서 쓰지 않는 것이냐? 내가 태조의 개창(開創)하신 뜻을 알고, 또 지리(地理)의 설(說)이 괴탄(怪誕)한 것을 알지만,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음양(陰陽)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하니, 내가 듣고 의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무인년 규문(閨門)의 일은 내가 경들과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조정의 사신이 오는 것과 성절(聖節)의 조하(朝賀)하는 일 같은 것은 반드시 이 궁에서 하기 때문에 때로 수즙(修葺)하여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ref><ref>태종은 경복궁의 터가 좋지 못하다여 자신이 따로 창덕궁을 지었다고 말한 바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ca_11406028_004&tabid=k 태종실록 14년 6월 28일])<br />{{인용문|“태조(太祖)가 처음에 경복궁(景福宮)을 지을 때 하윤(河崙)이 상서(上書)하여 정지시키고 말하기를, ‘산(山)이 갇히고 물[水]이 마르니 왕(王)이 사로잡히고 족속(族屬)이 멸할 것이므로 형세(形勢)가 좋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나, 태조가 짓던 전각(殿閣)과 낭무(廊廡)3007) 가 이미 갖추어졌고, 만약 중국의 사신(使臣)을 응접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또 경회루(慶會樓)를 그 옆에 짓고, 따로 이곳에다 창덕궁(昌德宮)을 지었다."}}</ref>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ref name="ch15">최종덕, 15쪽.</ref>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ref name="ch15"/>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ref name="yi59"/>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ref name="yi59">이상해, 59쪽.</ref>
 
[[인조 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ref name="ch223">최종덕, 223쪽.</ref>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ref name="yi60">이상해, 60쪽.</ref> [[조선 정조|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창덕궁 부용정|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ref name="ch223"/>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f name="ch223"/>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에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즉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ref name="ch223"/>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개조·이건하였다.<ref name="ch223"/><ref name="yi60"/>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ref name="ch223"/>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ref name="ch223"/>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날짜=2016-04-07|창덕궁 용마루에 세겨진 대한제국 오양꽃 무늬는 일제시대때 일본이 한짓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신사에도 이와같이 형식이되어있다.}}
64번째 줄:
[[파일:Donggwol-do.jpg|thumb|400px|동궐도]]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ref name="yi60">이상해, 60쪽.</ref>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ref name="ch20">최종덕, 20쪽.</ref>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ref name="yi62">이상해, 62쪽</ref>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ref name="yi62"/> [[풍수지리|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ref name="ch21">최종덕, 21쪽.</ref>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ref name="ch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