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서 (194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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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0월 23일]] 경기 부천에서 버스 운전을 하던 평범한 가장이었던 박기서는 오전 11시 30분 인천의 중구 신흥동에 있는 [[안두희]]가 사는 아파트에 ‘정의봉(正義棒)’이라고 쓴 몽둥이와 장난감 권총을 지니고 들어가 [[안두희]]의 부인을 묶은 뒤 옆방에 있던 [[안두희]]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당시 중풍에 걸려 있던 안두희는 무언가를 얘기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는 안두희를 살해한 뒤 자신이 다니는 부천시 소사구의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마친 후 인천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긴급구속 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4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24&officeId=00020&pageNo=1&printNo=23347&publishType=00010 백범 암살범 안두희 씨 피살], 동아일보, 1996-10-24 작성.</ref> 그는 범행동기에 대해 자신은 학창시절부터 김구를 존경해 왔고 95년 초 백범일지를 읽은 뒤 백범의 유지를 이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며, [[권중희 (1936년)|권중희]]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책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의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라는 진술도 하였다. 박기서는 범행 직전 권중희에게 전화를 걸어 안두희를 죽이겠다고 했으나, 권중희는 그를 살려 두어 김구의 살해동기와 배후세력을 알아내야 한다면서 범행을 말렸다고 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400329103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24&officeId=00032&pageNo=3&printNo=15918&publishType=00010 안두희 피살 범인주변-동기 평소 백범 추앙...응징 결심], 경향신문, 1996-10-24 작성.</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400329103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24&officeId=00032&pageNo=3&printNo=15918&publishType=00010 '의로운 일 했기에 후회는 없다'], 1996-10-24, 한겨레, 인천 박덕영 기자.</ref>
 
범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후 사회 각계에서각계 그의인사들은 범행박기서 직후부터석방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9000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구명 운동을 펼쳤으며펼쳤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700209126009&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27&officeId=00020&pageNo=26&printNo=23350&publishType=00010 안두희 살해 박씨 각계서 구명운동], 동아일보, 1996-10-27</ref><ref>{{웹 인용|url=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5|제목=안두희, 김구를 쏜 까닭은?(1949년 6월 26일)|성=김|이름=용삼|날짜=2015-06-26|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16-06-25}}</ref> 시민들은 그의 자택에 격려금과 위로 편지들을 보내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10700289124008&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11-07&officeId=00028&pageNo=24&printNo=2720&publishType=00010 안두희 살해 박기서씨 격려금 밀물], 한겨레, 1996-11-07 작성기사.</ref>
 
1997년 3월 범행에 대해 징역 8년이 구형되었다. 4월 인천지법은 정황을 참작하여 살인죄 최소형량인 징역 5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300289127007&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3&officeId=00028&pageNo=27&printNo=2844&publishType=00010 안두희씨 살해혐의 박기서씨 5년 선고], 한겨레, 1997-04-03 작성기사.</ref>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형량이 감형되었고<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0100289126010&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8-01&officeId=00028&pageNo=26&printNo=2946&publishType=00010 박기서씨 항소심 징역3년], 한겨레, 1997-08-01. 이종규 기자.</ref> 1997년 11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박씨의 범행동기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법질서 전체 관점에서는 용인될 정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라고 형량 확정의 취지를 밝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11800289131010&editNo=7&printCount=1&publishDate=1997-11-18&officeId=00028&pageNo=31&printNo=3039&publishType=00010 박기서씨 징역 3년 확정], 1997-11-18. 한겨레, 김의겸 기자.</ref> 형 확정 후 복역하던 중 박기서는 이듬해 1998년 3월 13일 정부의 대사면 때 풀려났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31400209101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3-14&officeId=00020&pageNo=1&printNo=23820&publishType=00010 552만 명 대사면 단행], 동아일보, 1998-03-14 작성기사. 하준우 기자.</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