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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shimitsu Ashikaga cropped.jpg|섬네일|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미쓰'''({{ja-y|足利義満|あしかがよしみつ}}, [[1358년]] [[9월 25일]] ~ [[1408년]] [[5월 31일]], 재위: [[1368년]]~[[1394년]])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이다. 봉호는 일본국왕(日本国).<ref>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 [[황제]]에게 '''일본국왕 원도의'''({{ja-y2|日本国王源道義|にほんこくおうげんどうぎ}}라는 봉호로 일본국왕에 책봉되었고, 그 후 이 명칭은 아사카가 막부 쇼군의 외교 칭호로 사용되었다.</ref> 부친은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 모친은 [[기노 요시코]](紀良子).
1379년([[고랴쿠]] 원년), 요시미쓰는 반 요리유키파 슈고 다이묘인 [[시바 요시유키]](斯波義将)와 [[도키 요리야스]](土岐頼康) 등이 저택을 포위하고 요리유키의 파면을 요구하자, 요리유키를 파면하였다([[고랴쿠의 정변]]). 후임 간레이에는 요시유키가 임명되었고 막부 정치의 주요 인사도 시바 파로 물갈이되었다. 요리유키에 대해서는 추토령이 내려졌으나 다음해에는 사면되어 숙로로서 막부 정치에 복귀했으며, 또한 정변 후에 요시미쓰의 쇼군 권력이 확립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요시미쓰가 시바·호소카와 양 파의 항쟁을 이용하여 상호 견제하게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요리야스 사후 발생한 도키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여 도키 가문을 토벌하였다([[도키 야스유키의 난]]). 1391년([[메이토쿠]] 2년)에는 야마나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여 11개 국의 슈고를 겸하여 ‘6분의 1 나으리(六分一殿)’라 불리던 유력 슈고 다이묘 [[야마나 우지키요]](山名氏清)를 도발하여 거병시켜 같은해 12월에 토벌하였다([[메이토쿠의 난]]).
 
또한 요시미쓰는 1378년(에이와 4년) 3월에는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에 임명되었고(쇼군이 우근위대장을 겸무한 것은 가마쿠라 막부의 [[고레야스 친왕]] 이후로 처음), 5개월 뒤에는 [[다이나곤|곤노다이나곤]]을 겸무하였다. 이후 조정의 장로인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자세를 보인다. 다음해 8월 14일, 도오치 도오야스(十市遠康)등 남조측 무가에게 빼앗긴 사사령의 반환을 요구하는 고후쿠지의 대중이 가스가 신사의 신목을 받들어 교토 안으로 들어와 강소(強訴)했다. 섭관 이하 후지와라 씨 계열의 공경은 신목의 신위를 두려워하여 출사를 자중하여 궁중 행사가 정체되던 중, 요시미쓰는 자신은 미나모토 씨라는 것을 이유로 계속 출사하여, 1380년(고랴쿠 2년)에는 일시 중단되어 있던 조정 행사들(御遊始・作文始・歌会始)을 대대적으로 재흥하여 역으로 대중을 위압하였다. 이 때문에 같은해 12월 15일에 대중과 신목은 막부의 도오치 토벌 약속 이외에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한 채로 나라로 돌아가 역사상 최초로 신목 입락에 의한 강소를 실패로 끝나게 만들어 사사 세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요시미쓰는 조부 다카우지와 부친 요시아키라의 관위를 훨씬 뛰어 넘어 [[내대신]], [[좌대신]]에 취임하여 승진을 계속해 나갔다. 1383년(에이토쿠 3년)에는 무가로서는 처음으로 겐지 장자(源氏長者)가 되었고, 준삼후(准三后) 선하를 받아 명실공히 공무 양 세력의 정점에 올랐다. 섭관가의 사람들에게도 헨기(偏諱)를 내리는 등 그 위세는 점점 강력해져 견제할 수 있는 자는 전혀 없었다. 또한 그때까지의 상황과 천황의 의사를 전하던 전주(伝奏)를 통하여 명령을 내려, 공무 일체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이례적인 조치도 [[산조 긴타다]](三条公忠)가 ‘선례를 뛰어넘은 존재’라 평했듯이 공가측에서도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어 요시미쓰의 가신이 된 공가나 도키와이노미야 미쓰히토 왕(常盤井宮滿仁王)처럼 애첩을 바치는 자도 나타났다.
 
1392년([[겐추]] 9년/메이토쿠 3년)에는 남조 세력이 전국적으로 쇠미했기 때문에 요시미쓰는 오우치 요시히로를 중개역으로 남조측과의 교섭을 진행하여 지묘인 계통과 다이가쿠지 계통이 교대로 천황위에 즉위하는 것(양통 질립)과 제 국의 국아령(国衙領)을 모두 다이가쿠지 계통의 소유로 할 것(실제로 국아령은 조금밖에 없었다)등의 화평안을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에게 제안하여 고카메야마가 가지고 있던 삼종의 신기를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이 접수하여 남조가 해소되는 형태로 남북조 합일을 실현시켜 58년에 걸친 조정의 분열을 종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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