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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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구 안동 김씨|구 안동]]
|배우자 = 최여옥 (약혼 중 사망), 최준례
|종교= [[유교]]([[성리학]])→[[동학]]→[[불교]]([[법명]]: 원종)→[[개신교]](감리교)
|종교= 개신교
|후임 = 이동녕
|후임대수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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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개신교인종교인, 교육자,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0005224 백범 발자국 따라 걸으면 큰길 되지요]</ref>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개신교]]에 귀의하였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제국|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ref>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ref><ref>[http://www.kimkoo.or.kr/02diary/sub.asp?pagecode=m02s01t05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ref>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ref>김삼웅《백범김구평전》시대의창,132쪽</ref>,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ref>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ref>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 김씨|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시|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화민국|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사쿠라다몬 사건|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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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교장 김구.JPG|썸네일|160px|right|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ref name="dd514">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페이지</ref>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ref name="dd514"/>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ref name="dd514"/>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ref name="dd515">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5페이지</ref>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ref name="dd515"/>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ref name="dd515"/>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국이다미궁이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향년 74세였다.
 
==== 암살의 배후 ====
[[파일:Tomb of Baekbeom Kim Gu.jpg|thumb|200px|김구의 묘]]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국이다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418002 "안두희는 美 방첩대요원...白衣社 단장이 암살 지시"] [[한국경제]] 2001년 9월 5일 작성</ref>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ref>[[이제는 말할 수 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46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0&ContentTypeID=1 비밀결사 백의사] [[문화방송]] 2002년 1월 20일 작성</ref><ref name="yum1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 신동아] 2001 년 10 월 01 일 (통권 505 호)</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86224 "염동진 백범암살 사주한 근거 없다"도진순 교수 반박문 기고] [[동아일보]] 2001년 9월 20일 작성</ref>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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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ref name="동평1"/>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ref name="동평1"/>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ref name="동평1"/>”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 (1924년)|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ref>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35페이지</ref>
 
=== 비판 ===
[[전북대학교|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학교|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와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ref name="s268">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ref><ref>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도진순, 당대, 2001) 262~263쪽</ref> 또,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35쪽</ref>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8쪽</ref>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 (경제학자)|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3260084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책임편집 이영훈 교수 인터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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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는 [[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ref name="kang11">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71쪽</ref> 훗날 [[중국 국민당|국민당]]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ref name="kang11"/> [[강준만]]은 [[미국]]의 패권장악과 [[중화민국]]의 몰락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ref name="kang11"/> [[이승만]]에 비교해서 웅변력이 떨어졌던 김구는 대중 선동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89쪽</ref> 이점 역시 김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김구는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한다.<ref name="경마" /> [[이승만]]도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ref name="경마"/> 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ref name="경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