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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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2년(충렬왕 8)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어서는, 전법판서(典法判書) 김서(金㥠)의 지위가 자기보다 위라는 이유로 사양한 후 그를 임명해 달라고 건의하자 사람들은 그의 겸양을 칭찬하였다. 마침 김서가 부친상을 당해 다시 곽예가 과거를 주관하게 되었는데, 합격한 자 중에 명사(名士)로 알려진 사람이 많았다. 이후 좌승지(左承旨)·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문한학사(文翰學士)로 승진하고, [[1286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올랐으며,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가는 도중에 죽으니 나이 쉰다섯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담박하고 곧았으며 겸손하고 안락해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선비 때와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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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고려의 문신]]
[[분류:고려의 정치인]]
[[분류:고려의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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