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문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점검이 필요한 외부 링크
60번째 줄:
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된 후, 수원 동탄 돌머루(석우리)에 은거하며 노작 [[홍사용]],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등 백조파의 문인들과 [[토월회]] 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하였다. 사발통문을 띄워 전국 방방곡곡의 식견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똑똑한 자식 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는 길이 나라를 찾는 길이라고 독려 전파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3319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영구 귀국한 이유]</ref>
 
한산이씨 세보에는 1865년 1월 11일에 출생하여 1915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 일제에 항거하는 계몽운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와 친일파는 1915년 일본인 암살자를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유숙하게 하여 이명직을 독살하였다. 이어 4년뒤 고종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며 극열히 저항하던 금광국 기수를 지내던 아들 이철규(李喆珪)도 일제에 의해 참살당했다.<ref>[http://blog.daum.net/enature/15853969 일제의 신하들 -정미칠적과 고종의 마지막 신하 - 이명직.이철규 부자]</ref>
 
외국의 신식 문물을 배워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경기 기흥 신갈에 있던 이명직의 묘를 이장할 때 후손과 묘역 꾼 중의 모개비(우두머리)에 의하면 이명직의 신체는 구척장신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