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라스페 폰 튀링겐 방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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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하인리히 라스페는 [[독일]]을 침공한 [[몽골 제국]] 군을 격퇴하여 되돌려보냈다.
 
[[1242년]] [[독일]] [[국왕]]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섭정으로 자처하던 마인츠 대주교 지크프리트 3세를 내치고 자신의 아들 [[콘라트 4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포했다. 동시에 프리드리히 2세는 튀링겐의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와 보헤미아의 왕 벤체르 1세를 공동섭정으로 선임한다. 그러나 같은 해 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하인리히 4세의 딸 아그네스의 후손이라는 점이 그를 추대한 근거였다. [[1245년]] 라스페는 콘라트를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에 의해 다시 독일 국왕으로 대관받았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축성받고 독일 국왕으로 추인되었다. [[1246년]] [[5월]] 독일의 일부 귀족들은 그를 대립 황제로 선출했다. 일부 독일의 귀족들은 그를 사제 왕(Pfaffenkönig)이라고 조롱했다.
 
[[1246년]] [[8월]] 하인리히 라스페는 [[헤세]] 남부 니더에서 [[콘라트 4세]]와 교전하였고, 울름과 이틀링겐 지역이 함락되면서 패하였다. 전투 중 치명상을 입은 라스페는 [[바르트부르크]]에서 퇴각했다가, [[1247년]] [[2월]] [[튀링겐]] [[백작령]]의 [[바르트부르크]] 근처 [[아이제나흐]]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아이제나흐의 [[성 카트린느 수도원]]의 자신의 부모 곁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