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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원래 [[신라]] [[상주]] 지방 농민이었다가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국경방위(西南海防戍)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때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견훤]]은 [[892년]] 거병하여 [[무진주]](광주)를 점령한후 독자적인 세력임을 선포하였다. 《삼국사기》는 그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그 무리가 한달(旬月)만에 5천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900년]]에 백제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주겠다며 [[백제]]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백제로 하고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모든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관직을 정하였으나, 관서와 관직명은 전하는 것이 없어 잘 알 수가 없으며 [[신라]]의 관제를 답습한 듯하다. [[견훤]]은 건국하면서 [[중국]]의 [[오월]](吳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기에 바빴다.
 
[[901년]](효공왕 5)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고 [[918년]]([[경명왕]] 2)에 [[고려 태조|왕건]](王建)의 건국을 하례하여 외교적으로 유대를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進禮城)<ref>[[무주군|무주]]</ref>으로 진격할 때 [[신라]]는 [[고려]]의 [[고려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여 그 도움을 얻었다. 이로 인하여 후백제와 [[고려]]와의 사이는 좋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신라]]·[[고려]]의 관계는 친밀하게 되어 후백제에게 공동의 적으로 종종 [[군사]] 행동을 가해 왔다. 이에 [[견훤]]은 먼저 [[신라]]를 징벌(徵伐)하려고 [[927년]]([[경애왕]] 4) 10월에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 [[경주시|경주]]로 쳐들어가수로인쳐들어가 마침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벌여 흥에 취하고 있는 틈에 수도 [[경주시|경주]]를 습격했다.
 
이때 [[경애왕]]을 죽이고 왕족 [[경순왕|김부]](金傅)를 [[신라 경순왕|경순왕]]으로 추대했다. 또한 왕제(王弟)·재상(宰相)·역대진보(歷代珍寶)·병장(兵仗)·자녀(子女)·백공(百工) 등을 취하여 [[군사]]를 돌이켰다. [[고려]]의 [[고려 태조|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팔공산|공산]](公山)에서 [[견훤]]군을 맞아 싸웠으나 [[김락]](金樂)·[[신숭겸]](申崇謙) 등 장군을 잃고 겨우 몸을 피하여 돌아갔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충돌이 잦았다. 그 중 [[934년]]에 [[고려 태조|왕건]]의 운주(運州)<ref>[[홍성군|홍성]]</ref> 친정으로 웅진(熊津)<ref>[[공주시|공주]]</ref> 이북의 30여 성을 잃게 된 후백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