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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주로 지배계층이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전 인구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천민계층까지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한일합방시대일제강점기|일제시대일제강점]] 직전 해인 [[1909년]] 민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6&aid=0000346041 한국족보박물관 개관…‘족보 문화’의 메카 대전을 가다], 《해럴드경제》, 2010년 5월 26일</ref>
 
조선 중기부터 천민층을 제외한 양인들에게 성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조선]]에서 성씨가 없는 무성층(無姓層)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족보매매, 족보위조, 공명첩 등을 통해 일부 천민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사회변화로 무성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8권에서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의 하나도 진짜가 없다.”며 이는 한 때의 세속(世俗)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적고 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김근식 교수(法制史)는 “김 이 박의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친족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고 평민, 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칭(僭稱)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