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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본부인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 (정치인)|김정숙]]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일찍 죽었고, 류경수는 다시 [[황순희]]와 재혼하였다.
 
=== 항일 빨치산독립 경력운동 ===
==== 만주 빨치산 경력 ====
[[1932년]]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하여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하였다.<ref><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ref> [[1933년]] [[9월]] 소왕청 마촌에서 [[김일성]]을 만나 어린 혁명가라며 칭송을 받고, 그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김일성의 측근이 된 그는 《그 품 떠나 못살아》라는 시를 직접 짓기도 했다.
 
 
=== 해방 이후 ===
==== 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 ====
해방 이후 귀국, [[1945년]] [[10월 21일]] 조선인민혁명군 등을 개조하여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소련 군정]] 하에서 전차 정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46년 8월 15일 보안대가 인민집단군으로 개편하는데 참여, 이때 그는 인민집단군 중좌가 되고, 조선인민군의 육군 훈련소인 [[나남 훈련소]] 4대대장이 되었다. [[1946년]] [[12월]] 인민집단군 제2사단이 창설되자 그는 인민군 제2사단 제4연대장 겸 연대장 [[강건]]의 부관에 임명되었다. [[1947년]] [[5월 16일]] [[김일성]]의 지시로 북조선 지역 최초의 전차 부대인 제115여단을 창설, 여단장이 되었고 부대는 후일 [[1949년]] 5월 [[제105기갑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105땅크려단]]으로 개편되었다. [[1948년]] [[2월]] 인민집단군을 확대개편한 [[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하였다.
 
[[1948년]] [중좌에서 대좌가 되었다. [[1948년]] [[6월]]부터 [[8월]]에는 인민집단군 115려단에서 땅크부대 창설 명령을 받고 땅크련대 창설에 착수했다. 3개월간 병사들에게 땅크 운전기술을 가르쳐 그해 [[11월]] 정식으로 조선인민군 땅크련대를 조직했다.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1949년]] [[2월]] 조선인민군 창군 1돐 기념일에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고, 얼마 뒤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 한국전쟁 참전 ====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 제105전차려단은 류경수 려단장의 지휘 아래에 [[조선인민군]] 제1군단 휘하 제1, 3, 4, 6사단에 제203, 109, 107전차연대와 제206연대가 배속되어 진격하였다. 그는 100호 전차를 타고 [[동두천]]과 [[의정부]]를 통해 내려왔다. 이때 동두천에 주둔중이던 [[대한민국 국군]] 소규모 부대를 격파한 뒤 그대로 직진, [[의정부]]에 주둔중이던 [[대한민국 국군]] 7사단에 저지당했으나, 인민군 3사단 18연대의 지원으로 의정부를 함락시키고 3일만에 서울에 입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