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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수'''(柳京洙, [[1915년]] [[9월 9일]] ~ [[1958년]] [[11월 19일]])는 [[일제 강점기]] 당시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이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었다. 본명은 '''류삼손'''(柳三孫)이다. 조선인민군 땅크부대의 창설 및 1946년~1949년 [[조선인민군]]의 전차 조종술, 기갑 훈련의 책임자였다.
 
[[1931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 [[1932년]] [[옌지 현]] [[반일유격대]]에 참여하고 소년군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김일성]]의 측근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하였으며, 인민군 땅크부대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조선인민군]] 육군 제105전차려단 려단장과 인민군 제3사단장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며, 전쟁 초반 [[서울]]에 입성하였으며, [[의정부]], [[평택]], [[대전]]을 함락시켰다. 그의 첫 부인은 [[김일성]] 주석의 본처 [[김정숙 (정치인)|김정숙]]의 여동생이었다.
 
== 생애 ==
=== 초기 활동 ===
[[1915년]] [[9월 9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셋째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삼손이라 지었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길림성]] [[옌지 현]] 팔도구(八道溝) 대흥촌(大興村)의 조선족 가정 출신이라 한다. 뒤에 [[김일성]]이 서울을 지킨다는 뜻의 경수로 이름을 지어주어, 개명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류경수는 소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고,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맹한 후 태평구 돌문안공청조직의 책임자 겸 소년선봉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ref><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ref> 그는 사격술에 뛰어났는데, 특히 경기관총과 권총을 잘 사용하여 백발 명중시켰고, 이후 주로 경기관총 사수로 활동하게 된다. 돌문안공청조직책임자 겸 소년선봉대소대장으로 활동하며 [[1931년]] [[김일성]]의 지휘하에 1931년 추수투쟁과 1932년의 춘황투쟁에 참가하던 중 [[1932년]] 봄 체포되어 [[룡정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932년 봄에는 일본군에 체포되여 룡정감옥에서 얼마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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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독립 운동 ===
==== 만주 빨치산 경력 ====
[[1932년]] 초,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하여 훗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하였다.<ref><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ref> [[1933년]] 봄 노두구(老頭溝), 해랑구(海浪溝) 일대에서 공산주의 관련 대중선전활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9월]] 소왕청 마촌에서 [[김일성]]을 만나 어린 혁명가라며 칭송을 받고, 그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김일성의 측근이 된 그는 《그 품 떠나 못살아》라는 시를 직접 짓기도 했다.
 
{{인용문2|가까운 곳에서도 먼곳에서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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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품 떠나 나는 못살아}}
 
[[1933년]]과 [[1934년]] 그는 [[민생단]]원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두 차례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34년]] [[6월]] 항일 무장 투쟁에 참가하고 [[1936년]] [[중국공산당]]에 조선인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1937년]] [[8월]] [[무송 현]] [[묘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묘령전투에 일본군 7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4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40여명의 일본군 병사의 귀순을 받아들여 유격대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박격포 1문, 중기 1문, 경기관총 3정, 보총 200여정을 비롯하여 포대로 3,000여 마대의 밀가루 등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밖에 [[장백 현]] 간삼봉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에 배속, 항일련군 중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1영 제1련대 제1중대 제1배장에 임명되었다. [[1939년]] 여름 [[연길현]] 천보산전투, 돈화현 요차전투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워 승전하였고, 그해 가을에 있은 안도현 한총구전투에서도 관동군 소부대를 궤멸시켰다.
 
[[1937년]] [[랴오닝 성]] 무산지구에서 국내로 진공하려던 무산지구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진공에 실패했고, 간삼봉 전투에서 소규모의 일본군 부대를 격퇴했다. [[1937년]] [[8월]] [[무송 현]] [[묘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묘령전투에 일본군 7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4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40여명의 일본군 병사의 귀순을 받아들여 유격대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박격포 1문, 중기 1문, 경기관총 3정, 보총 200여정을 비롯하여 포대로 3,000여 마대의 밀가루 등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밖에 [[장백 현]] 간삼봉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에만주 천보산(天寶山)전투, 한총령(寒總嶺)전투에 참여하였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에 배속, 항일련군 중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1영 제1련대 제1중대 제1배장에 임명되었다. [[1939년]] 여름 [[연길현]] 천보산전투, 돈화현 요차전투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워 승전하였고, 그해 가을에 있은 안도현 한총구전투에서도 관동군 소부대를 궤멸시켰다.
 
==== 소련 88려단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