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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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과 [[1934년]] 그는 [[민생단]]원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두 차례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34년]] [[6월]] 항일 무장 투쟁에 참가하고 [[1936년]] [[중국공산당]]에 조선인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1937년]] [[랴오닝 성]] 무산지구에서 국내로 진공하려던 무산지구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진공에 실패했고, 간삼봉 전투에서 소규모의 일본군 부대를 격퇴했다. [[1937년]] [[8월]] [[무송 현]] [[묘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묘령전투에 일본군 7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4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40여명의 일본군 병사의 귀순을 받아들여 유격대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박격포 1문, 중기 1문, 경기관총 3정, 보총 200여정을 비롯하여 포대로 3,000여 마대의 밀가루 등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밖에 [[장백 현]] 간삼봉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1938년]] 만주 천보산(天寶山)전투, 한총령(寒總嶺)전투에 참여하였다. [[1938년]] [[동북항일련군]]에 배속, 항일련군 중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1영 제1련대 제1중대 제1배장에 임명되었다. [[1939년]] 여름 [[연길현]] 천보산전투, 돈화현 요차전투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워 승전하였고, 그해 가을에 있은 안도현 한총구전투에서도 관동군 소부대를 궤멸시켰다.
 
==== 소련 88려단 활동 ====
[[1940년]]에는 만주 동만항일련군 2유격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전사한 김철운의 묘에 강위룡과 함께 남긴 편지가 [[2015년]] [[11월]]에 발견되기도 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1996 김철운항일투사 묘에 묻은 편지, 60년만에 발견]</ref>
 
1940년 말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군]] 간부학교에서 정식 군사훈련을 받고, [[소련군]] [[소위]]로 임관되어 [[제88 국제극동여단]]의 제1대대 1중대의 부소대장과 1중대 1소대장을 역임했다. [[1942년]] [[동북항일련군]] 교도려단에 배속 후 정찰대원에 임명되고, [[소련]] 인민군 제88특별려단에 편입되자 그는 88려단 교도대대 정찰대원이 되었다. 해방 후 38도선 이북으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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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참전 ====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 제105전차려단은 류경수 려단장의 지휘 아래에 [[조선인민군]] 제1군단 휘하 제1, 3, 4, 6사단에 제203, 109, 107전차연대와 제206연대가 배속되어 진격하였다. 그는 100호 전차를 타고 [[동두천]]과 [[의정부]]를 통해 내려왔다. 이때 동두천에 주둔중이던 [[대한민국 국군]] 소규모 부대를 격파한 뒤 그대로 직진, [[의정부]]에 주둔중이던 [[대한민국 국군]] 7사단에 저지당했으나, 인민군 3사단 18연대의 지원으로 의정부를 함락시키고 3일만에 서울에 입성하였다.
 
당시 인민군 제105땅크려단 35땅크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제312호 전차가 가장 먼저 [[서울특별시]]에 진입, 312호 전차 포장 고현빈이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중앙청]]건물에 [[인공기]]를 계양하였다. 류경수는 예하 연대를 통솔하여 [[서울특별시]]를 점령하였다. [[6월 28일]]에는 명령을 내려, [[서울대학교]] 대학 병원과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있던 대한민국 국방군 부상병들과 우익 인사들을 골라 사살하였다.
 
이에 따라 부대는 [[1950년]] [[7월 5일]]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수상에 의해 '서울' 명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그는 바로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7월 18일]] [[평택]]에서는 미 공군의 F-80기의 집중 공격으로 전차 38량과 자주포 9량, 차량 118량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평택을 지나 [[대전]]을 공략하여 대전시내를 함락시켰다. 이후 [[대전]]에서의 전투 성과를 기려 [[1950년]] [[7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54호에 의하여 군사 명예부대 칭호인 '근위대' 칭호를 수여받고 "근위 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된다. [[1950년]] [[8월]]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되였다. [[8월 13일]]에는 교체되어 조선인민군 제3사단 사단장이 되어 [[대구]]로 갔다. [[1950년]] [[9월]]에는 [[미국 군]]에 포위되어 식량과 비상미가 떨어진 상태에서 14일간 버텼으며, 당시 인민군 최고사령부와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1951년]] [[1월]] [[조선인민군]] 제3군단 군단장이 되었다.
 
2001년 5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089호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지휘관이었던 류경수의 공적을 기려 "근위 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으로 최종 명명되었다.
 
=== 생애 후반 ===
[[1953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휴전 이후 [[조선인민군]] 제5군단장, 인민군 제1집단군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5년]] [[7월]] [[네덜란드]] 해방 기념식에 참석차, [[네덜란드]]를 방문하고 돌아왔으며,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다시 당 중앙위원에 재선거되었다. 다시 제5군단장이 되었다가 [[1957년]] [[2월]] 인민군 제2집단군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8년 제2집단군 사령관 재직 중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진급한 후 [[1958년]] [[11월]] 제1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8년]] [[11월 19일]] [[뇌질환]]으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1961년]] [[11월 18일]] 사냥을 나갔다가 부하가 쏜 카빈 소총의 오발 사격을 받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1년]] 무렵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20일]] [[조선인민군]] [[차수]], [[민족보위성]] 부상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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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고리 ==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1996 김철운항일투사 묘에 묻은 편지, 60년만에 발견]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299 북, 류경수탱크사단장이 김철운항일투사 묘에 묻은 편지 60년만에 발견]
 
{{조선인민군 원수급}}
 
{{토막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사}}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1915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