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폰 론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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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테오도어 에밀 폰 론 백작'''({{llang|de|Albrecht Theodor Emil Graf von Roon}}, [[1803년]] [[4월 30일]] ~ [[1879년]] [[2월 23일]])은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대대로 [[플랑드르]] 출신으로서 프로이센 [[콜베르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프로이센군의 군인이었으나 [[나폴레옹 전쟁]] 도중 전사하였다. [[1816년]]부터 프로이센 육군유년사관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824년]]에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육군대학에 재학하여 2년 뒤에 졸업하였다. 이어 육군유년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고 [[1835년]]에는 대위로 진급, 프로이센 참모본부에 배속되어 프로이센 육군대학 강사로도 일하였다.
 
[[1848년]]에는 제8군단 참모장이 되었고, 같은 해에 독일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빌헬름 1세|빌헬름 왕자]]와 함께 군단을 이끌었다. [[1856년]]에는 소장, [[1859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이때부터 프로이센의 육군장관으로 재임하였다. 론은 프로이센의 예비군 제도인 란드베르[[란트베어]](Landwehr) 제도가 오히려 양질의 군대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된다고 느끼자, 예비군을 줄이고 정규군을 늘이는 육군 개혁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의회에서는 론의 이러한 행위를 맹비난하였으나 당시 수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그를 두둔하였다. [[1864년]], 슐렌스비히와의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3세 (독일)|프리드리히 왕세자]]와 함께 군을 이끌며 승전을 이끌어내자, 독일 내에서의 비판적인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뀌었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발발 직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871년]] 자작으로 봉해졌으며 [[1873년]] 1월에는 대장에서 원수로 진급함과 동시에 독일제국 제국수상으로 자리를 옮긴 비스마르크 대신 프로이센의 수상이 되었으나 열 달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879년]] 2월 23일, 75세를 일기로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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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11
|직책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의 총리|총리대신]]
|임기 =[[파일:Wappen Deutsches Reich - Königreich PreussenReichswappen (Mittleres).jpgsvg|center|x30px]]1873년 1월 1일 ~ 1873년 11월 9일
}}
{{프로이센의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