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식: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18번째 줄:
[[1943년]] [[5월 30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조선군 (일본 제국)|조선군]] 보도반 연습훈련에 참가했으며, 《국민문학》, 《문화조선》 등에 연습훈련 참가 소감과 결의를 담은 산문을 기고했다. [[1943년]] [[5월 27일]] [[조선문인보국회]] 주최로 열린 해군을 찬(讚, 찬양)하는 시 낭독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자작시 〈바다의 서설(海の序說)〉를 낭독했고, [[1943년]] [[6월 13일]]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간사로 선임되었다. 1943년 6월 15일부터 6월 20일까지 《문화조선(文化朝鮮)》 편집부 주최로 열린 〈연성(鍊成)하는 반도 청년(半島 靑年)〉 특집 사진전에서 시를 헌정하는 한편, 내선(內鮮) 시 낭독 연구 좌담회(1943년 7월 12일 개최),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미소기(禊) 연성회(1943년 8월 5일 개최) 등에 참석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문화/예술 부문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잡지 《문화조선(文化朝鮮)》 촉탁기자(1943년 4월 전후 ~ 1944년 2월), 《농공지조선(農工之朝鮮)》 편집장(1944년 3월),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기관지 《국민시가(國民詩歌)》 편집위원(1944년 3월) 등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부터 1950년 3월 퇴직할 때까지 서울신문사, 경향신문사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광복 이후부터 1950년 3월 퇴직할 때까지 서울신문사, 경향신문사에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주요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