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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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145~151쪽}}</ref>. 또한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붕당이 지배 계층인 양반 사회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붕당은 계급 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발전된 정치 형태로서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붕당 정치는 외척과 공신의 폐해가 컸던 조선 사회에서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횡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또한 절대 군주제 하에서도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중소 지주 계급 전체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오히려 [[조선 정조|정조순소]] 이후 붕당 정치가 붕괴하고 특정 가문이 독재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왕조가 휘청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거꾸로 붕당의 정치적 자정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종래에 학자들이 시데하라 아키라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쟁으로 말미암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주장해 왔으나 사실무근이다. 당쟁이 격심했던 이 시기는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부터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까지 50년 정도였으며, 이때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에 따르면, 모두 79명으로 1년에 약 1.6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