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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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년]] 미카일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앙숙인 [[제노바]]와 조약을 맺고 해군력을 증강하고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에 나섰다. 그해 [[7월 25일]] 알렉시우스 스트라테풀루스가 지휘하는 니케아군은 손쉽게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57년 만에 제국의 수도를 수복했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미카일은 이소식을 처음에 믿지 않았다고 한다. 미카일은 3주후인 [[8월 15일]] 수도를 회복한 영예로운 황제로 수도에 입성하였다.
 
수도입성 뒤 그는 아들 [[안드로니쿠스 2세|안드로니쿠스 팔라이올로고스]]를 정식후계자로 책봉하고 공동 황제였던 어린 소년 요한네스를 같은 해 12월, 실명시키고 [[마르마라 해]]의 성곽에 유폐시켰다. 이 행위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에 의해 파문되어 1268년에 새 총대주교로 교체될 때까지 파문장은 철회되지 않았다.
 
미카일은 처음 도시의 방어에 집중하였고 [[라틴 제국]]시대의 관습을 즉각 중단시키고, 비잔티움의 전통 관습과 제도를 부활시켰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할 때 그 도시의 인구는 3만 5천 명에 불과했으나 미카일의 치세 동안 꾸준히 복구를 계속하여 7만명까지 인구가 늘어났다.
 
=== 교회통일과 외교 ===
미카일은 아직 그리스 지역에 남아있는 라틴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외교적 교섭을 시도했다.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의 왕권]]을 노리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만프레디]], 프랑스의 [[루이 9세|성왕 루이]]등과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로마 교황]]과 손잡게 되었다. 이때 시칠리아의 왕권을 놓고 [[호엔슈타인 왕가|독일의 호엔슈타인]]과 [[앙주 가문|프랑스의 앙주]]가 경쟁했는데 [[앙주의 샤를]]은 만프레디와 콘라딘을 죽이고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이후 앙주의 샤를은 미카일의 최대 적수로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게 된다. 샤를은 쫓겨난 [[라틴제국의 보두앵 2세]]와 [[교황 클레멘스 4세]]와 함께 비잔티움에 반대했다.
 
미카일은 서둘러 교황청과 화해를 모색하고 [[1263년]]경부터 교섭을 분열된 동서 교회의 통일을 위한 시작했고 또한 [[제노바]]와 [[베네치아 공화국]]과도 교섭을 벌여 양측의 경쟁을 이용했다. 그동안 앙주의 샤를은 그 나름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리고 압박해왔고 [[1270년]] 11월 [[제8차 십자군|십자군]]을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그러나 폭풍우로 인해 시칠리아의 육군과 해군이 괴멸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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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 [[일 한국]]의 아바카 칸과 결혼
 
{{commons+cat위키공용과 분류|Michael VIII Palaiologos}}
{{전임후임
|전임자=[[요한네스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