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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군사 부문의 실세로서 부각되었으며 김일성 그룹의 권력장악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name="박명림1288"/>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 제2주기 기념연설에서 최용건은 한경철이라는 [[포병]]장교의 무공을 치하하면서 이 장교가 [[1949년]] [[8월]]의 국경분쟁에서 99발의 포탄 중 90발을, 10월의 국경분쟁에서 72발 중 54발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kimch58">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 58페이지</ref> 이를 두고 [[김영호]]는 '인민군의 [[포사격 명중률]]의 증가가 [[소련 군사고문단]]의 작전 참가로 인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최용건은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ref name="kimch58"/> 인민군 창설 초기 군부의 장악을 놓고 [[김무정]]과 [[김책]], [[강건]]이 갈등할 때 그는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관망하였다. 강건과 김책은 전사했지만 조선인민군 군부는 곧 친김일성 인사가 장악했고, 그는 [[김무정]]의 편을 들지 않았으므로 숙청을 모면하였다.
 
[[1950년]] [[6월]]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사석에서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조선공산당]]내에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김일성에게 일성 장군, 일성 동지, 자네, 일성이 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