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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oi yongkun1940.JPG|썸네일|160px|left|1940년대의 만주 군벌로 활동할 무렵의 최용건]]
 
이민 여사는 어려서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제법 학교 규모가 커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있었고 건물도 2층이었으며,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농민들을 모아 야학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최용건이 교장이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최용건을 따라온 젊은 선생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최용건은 이러한 항일 근거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했다.<ref name="항일빨치산1"/>'는 것이다. [[1929년]] [[11월]] [[소련]]을 방문, [[레프 트로츠키]]를 만나고 돌아왔다. [[1929년]] 황포군관학교에[[황포군관학교]]에 재학중인 조선인들 중 [[허형식]]을 비밀리에 포섭해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입당시켰다. 그리고 허형식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일본의 조선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최용건은 1929년 중반부터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과 긴밀히 연락하였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최추해라는 이름을 썼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ref name="항일빨치산1"/> 최석천이라는 가명 외에 그는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ref name="항일빨치산1"/> 그밖에 룡건, 용건(鏞鍵), 최용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0년]] [[6월 10일]]부터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일본 당국의 단속을 피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자 최용건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 일부를 회유하여 만주로 갈 때 데려갔다. 만주 체류 당시 그는 최석천(崔石泉)과 김지강이라는 가명을 썼으며 중국 자료에는 주로 최석천으로 나온다.
[[1930년]] 요하(饒河)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하면서 군사 훈련소를 개설하여 병력을 양성하였다. [[중국공산당]]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 북만주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발족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였다. 이후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하여, 이중당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중국공산당]] 빈현지구당 당 서기도 겸직했다. [[1932년]]에는 조선족 학생들을 위한 학교인 [[송동모범소학교]](松动模范小学校)를 개교하고 교장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그의 제자들 중 이민은 그와 함께 교도여단에서 활동했고, 배경천은 후일 그와 항일연군에서 활동하는 [[배성춘]](裴成春, 본명은 배경창(裴敬昌), 가명은 손명숙))의 남동생이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 정치위원이 되었다가, 군단장 이학만이 제4군장으로 가자 [[1936년]] [[11월]]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 대리[[군단]]장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병력 지휘, 통솔능력의 부족이 지적되어 곧 대리군단장에서 해임되고 제2로군 참모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정치위원회 서기직을 겸직했다. 이후 제2로군 참모장, 제7군장, 정치위원등 을 지냈다. 1938년에 다시 제2로군 제7군장이 되었다가 [[1939년]]에 [[소련]]으로 북상하였다.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하여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88 국제 여단 (소비에트 연방)|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가했다. 당시 직급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제2련 정치참모로, [[김책]], [[김일성]]보다 한 단계 높았다.
 
[[1932년]] [[10월]] 요하 지역에서 특무대를 창설하고 일본 주재소 습격과 무기 획득에 나섰다. [[1933년]] [[4월]] 조선인으로 구성된 요하 공농병(工農兵) 반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대장이 되었다. 33년 [[6월]] 중국인 구국군(救國軍)과 만나 자신의 유격대와 통합하고, 그는 구국군 제1려단 특무영으로 개편하였으며, 제1려단 참모장 겸 특무영장이 되었다. 그러나 [[1934년]] [[2월]] 요하 구국군이 궤멸당하자, 최용건은 자신이 이끄는 조선인부대를 이끌고 탈출, 요하 반일유격대로 다시 개편했다.
 
[[1935년]] [[8월]] 다시 요하 일대 중국인 항일부대들 지휘관들과 만나 함께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을 편성하고, 요하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제4단 참모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정치위원이 되었다.
 
==== 소련 동북항일련군 활동 ====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 정치위원이 되었다가, 군단장 이학만이 제4군장으로 가자 [[1936년]] [[11월]]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 대리[[군단]]장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병력 지휘, 통솔능력의 부족이 지적되어 곧 대리군단장에서 해임되고 제2로군 참모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정치위원회 서기직을 겸직했다. 이후 제2로군 참모장, 제7군장, 정치위원등 을 지냈다.
 
[[1938년]] [[1월]]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제7군장이 되었다가, 38년 [[11월]] 항일련군 제7군 참모장, [[1940년]] [[4월]][[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1940년]] [[11월]]부터 일본 관동군의 만주 항일군대 대토벌 때, 부대를 이끌고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 으로 북상하였다. 이후 소련 [[연해주]]를 거쳐 극동지방으로 이동하여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88 국제 여단 (소비에트 연방)|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가했다. 당시 직급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제2련 정치참모로, [[김책]], [[김일성]]보다 한 단계 높았다.
 
[[1940년]] [[3월 26일]] 최용건은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던 [[경락정]]에게 일본과 내통하고 변절을 선동하였다는 누명을 덮어씌워 총살형에 처한 뒤 "원체 사태가 엄중하고 상황이 긴박한데다가, 경락정이 당장이라도 일본군쪽으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미 총살해버렸다."는 내용의 서한을 [[주보중]]에게 보냈다. 그러나 경락정이 이전에 일본군 혹은 일본인을 만났다는 증거는 없다.
최용건은 눈물을 잘 흘렸고 감정적이었는데, 후일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한 북조선 사람은 최용건을 가리켜 "[[공산당]]답게 표독스럽지 못하고 무골호인의 기풍이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남파 간첩으로 왔던 [[이수근]]은 최용건을 경멸하여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1940년대 중반쯤 그는 [[중국공산당]] 만주특위 당서기에도 임명되었다.
 
[[1942년]] [[7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근처 [[비야츠크]]에서 88국제려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부참모장에 선출되었다.<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3~234페이지</ref> [[동북항일련군]] 교도려단은 곧 [[소련 극동방면군 제88보병려단]]으로 명칭이 개칭되면서 조선인과 기존의 소련 망명 고려인 및 비[[러시아]]인을 받아들여 확대되었으며, 그는 계속 부참모장에 유임되었다. 8·15해방 직전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 [[김일성]]·[[김책]](金策)·[[안길]] 등과 함께 [[조선]]의 해방사업을 추진할 [[조선공작단]] 결성에 가담하였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869a daum 백과사전-김일성]</ref>
 
==== 광복 직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