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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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5일]] 진보적인 인사로 구성된 '조선민주당 열성자 협의회' 가 소집되어 '보수 독선적인 [[조만식]]선생 일파를 민족 통일의 파괴자요, 배반자요, 결과에 있어서는 조국 건설의 방해자'로 규정 하였다.<ref name="kyongbb51">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편, 《북한현대사 1:한울아카데미 677》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한울, 2004) 51페이지</ref> [[2월 5일]]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열성자 협의회의 임시 회장에 추대되었다. 최용건은 [[조만식]]이 미국 제국주의에 현혹되어 민족을 배신하였다고 규탄하였다. 이어 [[2월 20일]] 내로 정식 당대회를 소집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당을 이끌 [[조선민주당]] 임시 중앙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강량욱]]이 임시 당수로 선출되고, 나중에 최용건이 정식 당수가 되었다.<ref name="kyongbb51"/> [[1946년]] [[2월 28일]]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55년까지 그는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ref name="박명림1288">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88족, 나남출판</ref> 에 선출되었다. 최용건은 [[조선민주당]]을 장악하자 대대적으로 '반동 숙청' 작업을 벌였다. [[4월 1일]]의 제2차[[조선민주당]] 중앙 위원회에서 최용건은 다시 한번 [[조만식]]을 성토하고, 각도당과 시군 당지부의 당원들을 대상으로 [[4월]] 말까지 전 당원 성분 심사를 선언하였다. 이때 조선민주당 [[흥남시|흥남]]지구당 위원장직을 박탈당하고 감금당한 소설가 [[김동명]] 등 일부는 탈출에 성공한다. 최용건이 [[조만식]]을 감금하는데 성공하자 [[한근조]] 등은 남한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1946년]] [[8월]] 최용건은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조선민주당]]을 장악한 최용건은 숙청과 동시에 당원들의 재산을 압수하였다. [[1946년]] 크리스마스에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제6차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연설을 통해 당의 역사, 과오, 그리고 전망을 검토했다. 최용건은 역사적인 11월 선거에 참여한 조선민주당과 30만 당원을 칭찬하면서, 민주당내에 유입된 농촌의 ‘봉건적 사고’,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적인 태도, 그리고 ‘반소 · 반공 분자들’의 문제를 일소할 것을 당원들에게 권고했다.<ref name="chaer201">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이정우 역, 서해문집, 2006) 201페이지</ref> 조만식이 숙청되고 최용건이 당수가 된 다음 [[1948년]] [[3월]]의 제3차 조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선민주당은 공산당의 당강령과 홉사한 강령을 채택하였다.<ref name="pijsso">오일환, 《김정일시대의 북한정치경제》(을유문화사, 1999) 93페이지</ref>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당은 완전히 로동당에 예속돼 버렸다.<ref name="pijsso"/> 이후의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에 의해 장악된 허수아비 기관이 되고 말았다.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내에 조선로동당 정책을 반대하는 자들을 찍어두었다가 그들을 비판하거나 협박, 회유했다. 최용건은 사망때까지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이었지만 동시에 [[조선로동당]]의 상무위원 등 조선로동당의 당직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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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8월 종파 사건}}
 
[[한국 전쟁]] 내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53년]]부터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의 재판관이 되어 재판에 참여하였다. 1953년 2월 7일 공화국 [[차수]]에 임명되었다. [[1954년]] 내각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5년]] [[4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1955년]] [[7월]] 내각 부총리 겸 민족보위성 상이 되었다.<ref name="공작1" /> 55년 [[12월]]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의 재판관으로 [[박헌영]]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중국]]의 [[마오쩌둥]], [[저우 언라이]]로부터 [[박헌영]]을 살려둘 수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이 무렵 최용건도 친중국 인사 내지는 종파분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1955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에보안부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56년 4월 23일부터 4월 29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고다시 선출되었고, 동시에 [[조선로동당|로동당]]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조선로동당]] 조직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이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중공업우선,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에 대하여 반대하자, 최고재판소 소장으로서 [[윤공흠]]을 비롯한 일부 내각 각료들을 단죄하였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957년 8월 종파 사건]]이 발생하면서 [[김두봉]], [[최창익]] 등이 숙청되었다. 이때 최용건도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별 혐의점이 없어 실각을 모면하였다.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