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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수학과 망명 ====
[[1918년]] [[태천소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시|정주]]의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장으로 교사를 겸하던 [[조만식]] 외에도 설립자 [[이승훈]], [[페허]]지의 동인이며 상징파 시인인 [[김억]] 등이 교사였고, 같은 학년 동급생으로는 [[함석헌]]이 있었으며, 2년 선배로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목사 [[한경직]]이 재학 중에 있었다. 오산중학교 당시 교사들 중 한 명이었던 [[조만식]]은 그를 각별히 아꼈다. 그러나 사상 노선이 달라짐으로써 뒷날 정적으로 돌변한다. 그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9년]] [[3월 1일]] 그는 [[3.1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 그해 말 풀려났다. 그후에도 몇 차례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가 학교측과 갈등하게 되었다.
 
[[1921년]] 봄, [[오산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중국]]으로 건너갔다. 인맥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와 선이 닿았던 그는 몇 명의 청년들과 함께 [[1921년]] [[4월]]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하여 임정에서 탈퇴하고 예관 [[신규식]](睨觀 申奎植)을 찾아갔다. 그는 군관학교 입학을 희망하여, 면담 직후 [[신규식]]은 운남육군강무당에 그의 추천장을 써주었고, 최용건의 [[오산중학교]] 3년 선배이자 [[장개석]]의 국민당 혁명군 소위로 복무 중인 [[김홍일]] 역시 추천장을 써주었다. [[1921년]] [[8월]] 다시 돌아와 개학, [[오산학교]]에 다녔다.
 
[[1921년]] [[8월]] 최용건은 [[오산학교]]에 [[미국인]] [[선교사]] [[교장]]부임 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최용건이 상하이로 갔을 무렵인 [[1921년]] [[4월]] [[조만식]]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임용 거부로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그해 [[8월]] [[오산학교]]에 미국인 교장이 부임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 교장 취임 반대 운동을 주동했고, 이는 동맹휴학으로 발전했다. 그해 [[9월]] 오산학교에는 [[유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하고 사태는 종결되었다. [[김일성]]에게 진술한 바에 의하면 [[오산중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인 교장이 오산학교에 부임해온다 하자, 선교사 반대 동맹휴학이 일어났고 최용건이 이 동맹휴학의 주모자였다 한다. [[김일성]]은 자신의 저서 [[세기의 회고록]]에 이를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