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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1949년]] [[6월 30일]]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통합, [[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되자 참여, [[6월 24일]]부터 [[6월 30일]]까지 통합준비위원회 임시위원장을 맡았다. [[6월 30일]] 통합이 확정될 때 임시위원장이었고, [[7월 1일]] [[김일성]]을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추대할 때 [[박헌영]] 등과 함께 공동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였다.
 
1948년 9월 [[평양특별시|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민족보위성상]]에 임명(9월 9일)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9110032920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9-11&officeId=00032&pageNo=1&printNo=601&publishType=00020 |제목 =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 = 1948-9-11 |쪽 = 1 |인용문 = <!--【公立通信】 평양 9일밤 방송에 의하면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전원 일치 찬성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수상으로 당선된 김일성 장군은 즉시 조각에 착수하여 정부성원명부를 제출하였는데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는 이를 만장일치로 비준하엿으므로 정부는 이에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이에 관하여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구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를 다음과 같은 성원으로서 구성함을 결정한다.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동 홍명희 동 김책 국가기획위원회장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국가검열상(국방상) 김원봉 내상 박일우 외상 겸임 박헌영 산업상 겸임 김책 농림상 박문규 상상 장지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규 사법상 이승엽 문화선전상 허정숙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도시경영상 이영 무임소상 이극로-->}}</ref> 그는 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군사 부문의 실세로서 부각되었으며 김일성 그룹의 권력장악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name="박명림1288"/>
 
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군사 부문의 실세로서 부각되었으며 김일성 그룹의 권력장악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name="박명림1288"/>
 
[[1950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 제2주기 기념연설에서 최용건은 한경철이라는 [[포병]]장교의 무공을 치하하면서 이 장교가 [[1949년]] [[8월]]의 국경분쟁에서 99발의 포탄 중 90발을, 10월의 국경분쟁에서 72발 중 54발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kimch58">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 58페이지</ref> 이를 두고 [[김영호]]는 '인민군의 [[포사격 명중률]]의 증가가 [[소련 군사고문단]]의 작전 참가로 인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최용건은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ref name="kimch58"/> 인민군 창설 초기 군부의 장악을 놓고 [[김무정]]과 [[김책]], [[강건]]이 갈등할 때 그는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관망하였다. 강건과 김책은 전사했지만 조선인민군 군부는 곧 친김일성 인사가 장악했고, 그는 [[김무정]]의 편을 들지 않았으므로 숙청을 모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