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 (190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amobot (토론 | 기여)
봇: 인용 틀 미사용 변수 삭제
2번째 줄:
 
== 생애 ==
=== 초기 활동 ===
[[191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김대우는 [[탑골 공원]]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대학|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1925년]]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명되면서부터는 유명한 친일파 관료가 되었다.

=== 관료 생활 ===
김대우는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평안북도]] [[박천군]]의 군수(1928),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장(1930)으로 승진했다.
 
[[1936년]] 총독부 학무국의 사회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민화 정책의 첨병인 이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김대우는 이 직위에 근무하면서 [[1937년]] 학무부 촉탁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기, 제창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하였다.
줄 19 ⟶ 23:
|장="나를 손가락질 해다오" - 전 홍익대학교 총장 이항녕}}</ref> 이렇게 승진을 거듭하던 김대우는 [[태평양 전쟁]] 종전 두달 전인 [[1945년]] 6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 해방 이후 ===
광복 직후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를 위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의 협상에 참가했으며, [[미군정]]이 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그도 계속 경북 지사로 근무하다가 [[10월 19일]]에야 미군 도지사의 고문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