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 미쓰히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8번째 줄:
 
=== 프로 야구 선수 시절 ===
1959년,1959년에 [[퍼시픽 리그]] 팀인 [[오릭스 버펄로스|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면서 당초에는 언더핸드 특유의 뻗음이 있는 [[속구]]가 [[무기]]였으며 1962년 5월 24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 17개의 탈삼진이라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당시)을 세웠다. 같은 해 [[요네다 데쓰야]], [[가지모토 다카오]]에 뒤를 이어 8승을 올리는 등의 두각을 나타내면서 1964년부터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특히 1967년에는 20승 10패와 1.75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여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평균 자책점|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타이틀]]을 석권했다.석권해 한큐의 첫 우승에 기여했으며기여했다. 투수인 요네다·가지모토, 타자인 [[다릴 스펜서]]·[[나가이케 도쿠지|나가이케 아쓰시]]를 누르고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퍼시픽 리그 MVP]]에도 선정됐다. 같은 해에 열린 [[1967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상대팀이자 [[V9 (요미우리 자이언츠)|V9]]시대의 시대를 맞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패했지만 그중 2승은 모두 아다치가 올린 것이었으므로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감투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8년에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그 해엔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고 그 다음 해에도 2승에 그치는 등 침체를 겪었다. 성적 부진에 의해서 그때까지의 구위는 잃었으나 이전에 습득했던 [[싱커]]를 무기로 삼아 1971년에는 시즌 19승을 올리면서 부활을 이뤘고 [[그 다음해인 1972년에도 시즌 16승을 기록하는 등 요네다 데쓰야]], [[가지모토 다카오]], [[야마다 히사시]] 등과 함께 한큐 황금 시대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 아다치는 [[언어 유희|서투를 정도의 익살스런 표현]]을 섞어가며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인용문|
57번째 줄:
컨트롤이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부근부터 [[몸에 맞는 볼]]이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공이 느리기 때문에 달려들지 못하도록 하려고 가끔씩 경고하는 의미로 몸쪽을 바짝 공략했다”는 결과라고 말한다.<ref name="HankyuOugonNoRekishi" />
 
33세가 된 1973년에는 체력적으로도 쇠퇴하였고 기술적인 벽에 부딪치면서 또다시 4승에만 그칠 정도로 극심한 부진을슬럼프를 겪었는데겪었다. 이번에는 원래예전부터 가지고갖고 있던 [[커브 (야구)|커브]]를 더욱 연마하여 두 종류의 커브를 나눠 던지는 투구 기술을 몸에 익혔다. 더욱이 상대방의 호흡이나 노림을 벗어나는 투구 방법도 몸에 익히면서 1974년부터는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1976년에는 아다치로부터 싱커를 몰래 배운 야마다가 26승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아다치 자신도 17승을 올리면서 한큐의 완전 우승(2시즌제의 전·후기 리그 모두 우승)에 기여하였고 아다치 자신도 17승을 올리면서 야마다와 함께 한큐 투수진의 축을 이뤘다기여했다.
 
1978년, 오랜 세월 낮은 투구 자세를 지탱했던 [[무릎]]을 다치면서 이후에는 뚜렷한 활약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성적이 침체됐고 1980년 시즌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전년도인 1979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려고 했지만 1980년에도 코치 겸임으로 선수 등록을 했다<ref>[http://www.sportsclick.jp/sportscard/column01/index36.html {{lang|ja|しゅりんぷ池田のひとくちコラム! 第36回:引退選手のカード制作で要注意の“一軍試合出場なし”}}] - SportsClick</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