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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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은 끼친 것은 사무엘보다 수산나 웨슬리였다. 수산나는 점심 식사와 저녁 기도 시간 전에 아이들을 불러 배운 것을 잘 익혔는지 점검해 보았다. 수산나는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지 못하게 했고, 무분별하게 간식 먹는 것도 엄격히 금했다. 이를 어길시에는 어김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를 맞고 나서 큰 소리로 우는 것도 금했다. 수산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의 의지를 정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 형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치면서 수산나는 아이들 한 명 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 시간을 그리워 하였다.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에시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1709년]] 2월 9일 목사관에서 일어난 화재일 것이다. 당시 웨슬리는 다섯 살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화재를 보고 피신한 것과 달리 웨슬리는 늦게까지 화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불이 난 사실을 알고 간신히 창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사무엘 웨슬리는 아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화재가 심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사무엘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여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찰나에 같이 불을 끄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했고, 웨슬리가 구조되자마자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이 무너지던 찰나 구조된 웨슬리를 보고 수산나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산나는 스가랴 3장 2절을 인용하며 웨슬리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불렀고, 웨슬리 자신도 이 별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열한 살이 된 [[1714년]],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 School)에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에서의 생활은 결코 풍족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웨슬리는 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내었다. 차터하우스에서 6년 간 수학한 후,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에 입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