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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국과 초기 개화파 시절 ====
[[파일:독립신문.jpg|thumb|210px|right|윤치호는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2대 사장에 취임했다.]]
[[1895년]](고종 32년) [[2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 [[2월 13일]] 배편으로 입국하여 돌아왔다.
귀국 후 [[2월 15일]] [[김홍집]] 내각에서 [[의정부]]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외무부]][[협판]]을 지냈다. 그러나 [[박영효]] 내각에서는<ref name="daum2"/> 그에 대한 감시는 끊이지 않았고, 그는 [[김홍집]] 등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측에서 그에게 경호원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으나 마음만 받겠다며 조용히 거절하였다.
그 뒤 [[영의정|총리 대신]] [[비서|비서관]]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5월 10일]] [[학부 (대한제국)|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음력 윤5월 27일 다시 [[외무부]][[협판]]이 되었다. [[6월]]초에는 [[조선]]을 방문한 [[이탈리아]] 국왕의 조카 아부리를 만나 면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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