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촉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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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년]](건안 16년) 익주 자사 [[유장 (후한)|유장]]이 [[법정 (후한)|법정]]을 파견해 유비를 맞아들이고 한중군의 태수 [[장로 (후한)|장로]]를 공격했다. 그러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장과 대립하게 되어 [[가맹관]]에서 군사를 돌려 [유장을 공격하지만, 군사 [[방통]]이 장임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래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 등과 함께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의 군현들을 평정했다. [[충칭|강주]]에 도착하자 조운은 [[루저우 시|강양]]을 거쳐 성도로 진군, 성도 포위의 일축을 담당했다. 유장의 항복 후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将軍)에 임명되었다.
 
[[219년]] [[한중 전투]]에서 [[황충]]은 군량수송을 끊는 역할을 맡았는데 때가되도 돌아오지않자 조운이 마중나아가 황충을 도와주었다. 조조군은 군세를 강화해 다시 조운의 진영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조운은 문을 활짝 열고,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운의 진영 앞에 도착한 조조군은 그 정적을 보고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조운이 북을 치고 쇠뇌를 쏘아 적군을 공격하자, 깜짝 놀란 조조군은 북새통이 되었고 많은 병사들은 달아나다가 한수(漢水)에 빠져 익사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다음 날 아침 유비는 몸소 조운의 진영을 방문하고 전날의 전장을 시찰하면서 “조운의 몸은 모두 간(肝)덩어리다”라고 칭찬하였고, 군졸들은 조운을 호위장군(虎威将軍)이라고 불렀다.
 
[[손권]]이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살해하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손권을 공격하려 했다. 조운은 “먼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 (삼국 시대)|오나라]]는 자연히 굴복할 것입니다. (중략) 위나라를 방치하고 먼저 오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전투가 일단 시작되면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유비를 만류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군하고, 조운을 강주에 남겨 후방을 단속하게 했다. 유비가 자귀에서 패배하자 조운은 구원에 나서 [[백제성|영안]]까지 진군하지만 오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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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장병의 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등지는 “조운 스스로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장병들은 흐트러짐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고 대답했다. 제갈량은 조운에게 남은 군수품 견사(명주실)를 그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게 했지만, 조운은 “전쟁에 진 자가 어찌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군수 물자는 모두 창고에 모아 10월에 겨울 준비 물품으로 하사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해, 규율을 지켜 패전 책임을 분명히 했다. 제갈량은 이를 보고 "살아 선제께서 말씀하시길 자룡은 군자라 하였는데, 그 말이 헛되지 않도다" 라고하며 더욱 조운을 존경했다고 한다.
 
[[261년]]에는 [[대장군]] 순평후(大将軍 順平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운은 강직하고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하였으며 주변인들에게 오만한 면이 있었던 관우, 장비와 달리 주변 사람들에게 순후하고 후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유비에게도, 제갈량에게도 인정받았다. 진수는 조운을 일컬어 황충과 함게함께 유비의 조아(爪牙)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 참고문헌 ==
《[[삼국지]]》 촉서 조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