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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는 [[한자 문화권]]에서 아육왕(阿育王)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권좌에 있는 동안 [[불교]] 장려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인도 전역에 불교를 퍼트렸다. 동부 해안 [[칼링가]]국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에서 승리한 이후 무력 정복을 포기하고 대신 비폭력과 사회 윤리에 기초를 둔 '다르마(dharma:올바른 삶의 원리, 法)에 의한 정복'이란 정책을 폈다. 아소카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마애]](磨崖)와 [[돌기둥]]石柱에 그것을 새겨 적절한 곳에 세워두었다.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돌기둥 주두(柱頭)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었으며, 바위 조칙(詔勅), 석주 조칙이라고 불리는 이들 명문(銘文)은 대부분 아소카 치세 동안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 그의 사상과 활동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아소카의 삶과 업적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인 [[오리사오디샤 주]]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혹한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법 (불교)|다르마]](dharma: 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부모·어른에 대한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펼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쪽 국경의 그리스 세력도 그들사이의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반 생활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이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뒷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또 아소카의 정치이념은 인근 제국이나 민족에게까지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節)이 [[이집트]]·[[마케도니아 왕국|마케도니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