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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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5-08-09}}
{{전쟁 정보
|분쟁 = 루거우차오 사건
|전체 = [[중일 전쟁]]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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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나라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 [[서유럽|서방]]측 명칭
** {{llang|en|''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 {{llang|en|''Battle of Lugou Bridge''}}(루거우 다리 전투)
 
*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측 명칭
** {{zh|t=七七事變|s=七七事变|p=Qīqī Shìbiàn|h=치치 시볜}}: 7.7 사변
** {{zh|t=盧溝橋事變|s=卢沟桥事变|p=Lúgōuqiáo Shìbiàn|h=루거우차오 시볜}}: 루거우차오 사변
** {{zh|t=七七盧溝橋事變|s=七七卢沟桥事变|p=Qīqī Lúgōuqiáo Shìbiàn|h=치치 루거우차오 시볜}}: 7·7 루거우차오 사변
 
* [[일본]] 측 명칭
** {{llang|ja|盧溝橋事件|Rokōkyō Jiken/로코쿄 지켄}}: 로코쿄 사건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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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전개 ==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카니치로 타시로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 양 군은 서로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일본군병사는 20분 뒤에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곧 전투태세에 들어가 다음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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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당은 7월 7일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질 것.
* 쑹저위안 등 29군의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할 것.
이같은 조건을 내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침략을 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 결과 ==
중국군은 기계화 병력인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베이징은 8월 29일에, 다음날은 [[톈진]]이 함락되었다. 이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 되었고 중국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당은 [[홍군|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對)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 함께같이 보기 ==
이 사건과 비슷한 자작극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다.
*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 독일 대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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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대 월남 : 통킹만 베이 사건
 
== 각주 ==
 
<references />
 
{{중일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