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슬라브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1번째 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신슬라브주의 (또는 신범슬라브주의)의 형태로 부흥했었던 범슬라브주의 사상들은 19세기 말 대중성을 잃고 잊혀졌다. 러시아의 네오슬라브주의자들은 (주요 활동가로 B. Бебринский 백작이 있다) 다른 슬라브 국가의 활동가(보헤미아인인 К. Крамарж, 슬로베니아인인 И. Грабар 外)들과 함께 잠재적인 독일의 위협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슬라브국가 간의 연합에 관해 논의하기 위한 슬라브 국제회의를 [[프라하]](1906년)와 [[소피아]](1910)에서 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혁명]]기간 동안 К. Маркс, ф. Энгельс, В. Ленин의 비난을 받는 등 범슬라브주의 이념은 러시아에서 잊혀졌다.
 
[[1941년]] [[6월 22일]], [[독소동부 전선 전쟁]](Великий제2차 отечесвенный세계 война대전)|동부 전선]]의 시작과 함께 슬라브인들 사이에서 구 러시아 정치가 다시 부흥했다. [[1941년]] 8월 모스크바에서 전(全)슬라브위원회가 창설됐으며, 슬라브 출신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미국]], [[영국]], [[캐나다]]에 슬라브 위원회가 생겼다. [[1946년]] 모스크바에서의 제1회 전슬라브대회 이후, 모든 슬라브국가에서 모여든 대표단은 Белград에서 슬라브 국제회의를 열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소련]] 사이의 긴장관계가 첨예화되면서 모든 슬라브 위원회의 활동이 중지됐다.
 
[[분류:범국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