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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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lied Soldiers Like London and London Likes Them- Overseas Troops in England, 1940 D1730.jpg|thumb|1940년 런던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군]]
사실상 위원회를 [[망명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장애물은 프랑스였다. [[에두아르 달라디에]]의 프랑스 정부는 위원회에 대한 야망과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야망 사이에서 반대 감정이 엇갈리고 있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지만, [[네빌 체임벌린]]의 요구에 궁극적으로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찾아온 이후 그와 그의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이나 나치 중 어떤 국가의 위협이 더 클지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그는 위원회를 비정부 기관으로써 인정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그의 정부는 베네시에게 어떠한 언급도 없었고,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많은 가능성만 보고 있었다. 베네시에게 망명 정부라는 지위를 줄 때, 프랑스 정부의 많은 의구심들 중 하나는 독립한 [[슬로바키아
베네시 위원회를 가장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던 것은 연합군이 프랑스 공방전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패망으로 새로 임명된 총리인 [[윈스턴 처칠]]의 관점이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한 걱정으로 점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 총리보다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공방전이 끝난 후 그는 베네시를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재빠르게 승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는 여전히 이 승인에 대해 불확실함을 떨쳐낼 수 없었는데, 베네시가 대통령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만 했을뿐 실질적으로 베네시를 이전에 존재했던 정부와 연계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영국 정부에게 더 큰 확실성을 보장받기 위해 1941년 4월 영국 정부를 압박했고, 같은 해 4월 18일 그들은 영국 정부에게 "그들과의 협정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라는 이름 하에 1948년 9월 이전의 정부로 결론지어지도록" 요구했다.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에덴은 1941년 7월 18일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발표했다.<ref name=Talmon>Talmon, Stefan. ''Recognition of Governments in International Law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governments in exile''.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119.</ref> [[미국]]과 소련 또한 1941년 말 영국과 같은 행동을 취했고, 이는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양국에 선전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추축국]] 정부들은 이에 대항해 비공식적으로도, 또 공식적으로도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1941년 중후반에 인정하였다.<ref name=End/> 남아있는 법적 문제는 베네시 정부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실질적으로 계승한 국가이냐 아니면 베네시의 독립된 법적 지지 기반이었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1942년 봄, 보헤미아의 체코슬로바키아 연합 작전 사령부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안트로포이드 작전이라 불리는 이 임무의 성공은 영국과 [[자유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뮌헨 협정을 부인하고 베네시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계승 정권임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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