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바티아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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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의 실험 ===
프랑코 바띠아또는 22세에 밀라노로 이주해서 곧 싱글 La Torre를 녹음했고 TV 출연까지 해냈다. 몇몇 팝송을 커버하기도 했고 이후 E l'amore같은 곡으로 더욱 성공을 거둔다. 그는 1970년 실험적인 음악가 Juri Camisasca를 만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오사게 트리베(Osage Tribe)를 결성한다. 하지만 몇곡만을 함께 녹음하고 탈퇴한 뒤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첫 싱글은 La convenzione였다.
 
1971년 경부터 바띠아또는 실험적인 전자음악을 많이 내었다. 당시 그의 음반은 소량만 팔려나갔지만 지금은 전세계적인 수집대상이다. 뒤틀린 보컬과 각종 실험이 섞인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시작해(Foetus, Pollution) 점차 미니멀리즘과 절대주의 음악으로 바뀌어갔다.(Sulle Corde di Aries, Clic) Clic(1974)은 전자음악적 실험이 극대화된 앨범으로 [[필립 글래스부터글래스]]부터 캔에[[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뮤지션이 연상되는 앨범이었다.
 
1975년에 그는 디스끼 리꼬르디 레이블로 옮겨가서 앨범을 내었으며 그중 L'Egitto prima delle sabbie(1977)은 [[스톡하우젠]] 상을 받기도 했다
 
=== 전국적인 성공 ===
바띠아또는 더이상 프로그레시브 록을 하지않고 대중음악가가 되어 레이블도 EMI로 옮긴다. 작업을 도와주던 바이올린 주자 Giusto Pio의 참여로 사운드가 풍성해졌다.
 
그는 La voce del padrone(1981)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앨범은 최초로 이탈리아 내 판매량 100만장을 넘은 앨범이 되었다. 이런 상업적 성공은 알리체와 함께한 곡 I treni di Tozeur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콘테스트]]에 참여했을때 절정을 달렸다. 
 
Fisiognomica(1988)도 30만장 이상 팔린 히트작이며 바띠아또 스스로 음악과 가사가 가장 조화를 이룬 앨범으로 여기는 작품이다. Veni l'autunnu같은 곡은 시칠리아어와 아랍어 가사를 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