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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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대개 [[세조 찬위|세조의 찬위]]를 도운 공신·총신(寵臣)·어용학자들로서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공신전]]의 지급을 받아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신숙주]], [[서거정]], [[이극돈]] 등이 이 무리에 속했다. 이들은 능란한 문필로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관학파]]와 [[권문세족]]의 자손들이 조선 훈구파로 가기도 했다.
 
[[조선 성종|성종]] 즉위 이후 [[사림파]]의 등장으로 안전에 위협을 느꼈으나, [[조선 연산군|연산군]] 대에 들어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종 반정]] 이후 [[기묘사화]]에서도 훈구파가 승리하였고, [[조선 명종|명종]]때 [[을사사화]] 통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선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남은 잔존 훈구파들은 대부분 [[서인]]에 가담한다.<ref>사실 붕당정치가 발생할 때 서인은 훈구파 가문 출신이던 [[심의겸]]과 [[이이]]의 영향을 받아서 대부분의 훈구파 신하들은잔존 서인으로세력 전향한다처리에 대해 소극적이었다.</ref>
 
이러한 훈구파는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다. 15세기 이래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이를 배경으로 발달한 상공업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서해안의 간척 사업과 토지 매입 등을 통하여 농장을 확대해 나갔고, 대외 무역에도 관여하였으며, 공물의 방납을 통해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