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고즈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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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zui Otani.jpg|thumb|right|200px|오타니 고즈이]]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대곡광서,[[1876년]] [[12월 27일]] ~ [[1948년]] [[10월 5일]])는 [[일본]]의 종교가이다. [[1903년]]에 이버지의 뒤를 이어 정토진종 [[니시혼간지|서본원사]](浄土真宗 西本願寺)의 22대 세습법주가 되었다. 작위는 [[백작]], 법명(法名)은 경여(鏡如)이다.
 
[[영국]] [[런던]]에서 유학을 했던 혈기넘치는 젊은 [[인텔리]]로, 일본 서본원사(西本願寺)의 젊은 [[승려|주지승]]이자 학승(學僧)이었다. 27세가 되던 젊은 나이에 중앙아시아 1차 탐험([[1902년]] ~ [[1904년]])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총 3차까지 원정을 떠난다.
 
[[둔황]](敦煌: 돈황)과 [[쿠차]] 등지의 예술품들을 구입하거나 약탈해와 소장을 하고 있었는데, 서본원사(西本願寺)의 파산으로 그 일부를 당시 일본의 [[재벌]]인 구하라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1916년]] 구하라의 고향친구였던 [[데라우치]] 총독이 있는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 물론 구하라가 그냥 선물로 준 것은 아니고, 조선광산채굴권에 대한 뇌물로 준 것이다.{{출처|날짜=2009-7-14}} 이 물품들은 [[해방]] 후 한국 국고에 귀속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타니의 전체 소장품은 무려 5,000점이나 되었는데, 그 중 1/3은 일본에, 나머지 1/3은 [[한국]]에, 나머지는 [[중국]] [[뤼순]](旅順: 여순)에 분산되었다.
 
승려였던 오타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가 [[당나라]] 승려가 아니라 [[신라]]의 학승이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