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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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을 유월절과 동일시 할 수 없으며, 유월절 자체와 그와 연장선상인 부활절에 대한 내용을 다루도록 수정. 가톨릭대사전 및 전례사전 출처 보완
12번째 줄:
유월절 다음 첫 [[안식일]] 다음날(주일)은 [[초실절]](오메르)이다.
 
== 기독교에서의 변화 ==
기독교에서도 유월절은 유대교처럼 교회에서 공식적인 전례로 기념하진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구약의 절기로 여긴다. 흠 없는 양을 잡아 그 피로 재앙으로부터 구원받고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온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예표로 상징되었으며 유월절을 전후로의 기간 즉,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파스카 성삼일 기간은 유월절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교회력의 핵심적인 절기로 자리 잡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닛산1월 14일 저녁에 성만찬을 하였다. 초기에는 노예등 하층민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귀족들까지 입교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로마에 위치한 로마교회의 주장이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성찬식은 원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다.(고린도전서 11:26)
그러나 로마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에 성찬식을 하게 되었다.
 
유월절은 성경에서도 명확하게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를 이야기해주는 지침이 되는 날이었으며, 동시에 이 날은 저녁식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12사도들이 모임으로써(이른바 '최후의 만찬') 성체성사(혹은 성만찬)를 제정한 날이었다. 성체의 의미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해 흘릴 몸과 피는 유월절 어린 양과 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유월절의 흠 없는 양이라는 것이 신학적으로 명확해진 것이었다. 이 날은 교회 전례력에서 '성 대 목요일'(성체성사 제정 기념일/주님 만찬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1차 유월절 논쟁[교회사 초대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의 새로운 전통은 예수님께서 지킨 닛산1월14일 저녁에 성찬식을 행해오던 동방교회들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155년경 로마교회 지도자 아니케터스와 동방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캅은 이 논쟁에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은 폴리캅은 유월절에 성찬식을 하는것은 예수님때로 내려온 전승임을 강조하였으나 양편은 서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기독교에서는 참된 유월절 어린 양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유월절을 전후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구원의 예표인 유월절 기간은 점차 진정한 구원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바뀌어 갔다. 2세기부터 3세기까지 동방교회 특히 성 사도 요한과 필립보의 전통을 따르는 폴리카르포, 사르디스의 멜리토 등의 교부들은 유대적 전통과 신학적 예표 의미가 강한 유월절의 날짜인 니산월 14일을 그대로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삼자고 주장했으나, 서방교회는 부활이 일어난, 니산월 14일 후 바로 돌아오는 일요일에 지내는 것을 주장했다. 부활절 논쟁이라 불리는 이 논쟁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서방교회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마무리되었다.(춘분 후 첫 보름달이 지난 주일)[* <ref name="부활절 논쟁-가톨릭 대사전">{{웹 인용|title=부활절 논쟁|url=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1280&keyword=%BA%CE%C8%B0%C0%FD+%B3%ED%C0%EF&gubun=01}}[* <ref name="과월절 예식">{{웹 인용|title=과월절 예식|url=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6608&keyword=%B0%FA%BF%F9%C0%FD&gubun=04}}
2차 유월절논쟁[유세비우스 교회사],[[교회사 초대편]]
이후197년경 당시 로마교회 감독 빅터는 유월절(닛산 1월 14일 저녁)이 아니라 유월절 다음 첫 일요일에 성찬식을 하는 [[도미닉의 규칙]] 을 채용하도록 전 교회에 강요하였다. 동서방 각지에서 여러가지 회의가 열렸는데 그 결과 동방교회을 제외한 각지에서 도미닉의 규칙을 채용하게 되었다.
동방 에베소감독 폴리크라테스는 빅터에게 편지를 보내어 동방교회들을 지도했던 사도 빌립, 사도 요한, 여러순교자들이 닛산1월14일에 유월절 지켰으며 8대 감독인 자신도 전승에 따라 지키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이에 빅터는 동방교회들을 비정통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으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의 만류로파문을 취소했다.
 
이 분쟁이 4세기에 다시 점화되어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재한 325년 [[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성찬식을 춘분후 만월 다음의 첫 일요일로 정해졌다[간추린 교회사]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공식적인 전례로 유월절을 기념하지는 않으나 본당이나 가정에서 기념 차원에서 재현할 수 있다. 이 예식 거행에서 최후의 만찬이 다시 이뤄지지는 않지만 구원 역사의 공통뿌리는 인식하는 차원에서 유월절의 참된 의미가 담긴 '하가다'에 규정된 예식을 정확하게 재현하며, 이는 또한 유월절 축제를 처음 시작하였으며 그 대상이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신앙적 존중이기도 하다.[* <ref name="과월절 예식">{{웹 인용|title=과월절 예식|url=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6608&keyword=%B0%FA%BF%F9%C0%FD&gubun=04}}
== 같이 보기 ==
* [[성 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