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애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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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 책봉과 태후 ===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고려 경종|경종]](景宗)의 비로 간택되어
[[981년]] 남편인 [[고려 경종|경종]]이 죽자 당시 2살에 불과하던 헌애왕후의 아들 [[고려 목종|왕송]](王訟) 대신 그녀의 오빠인 황주원군 왕치(王治, [[고려 성종|성종]])가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출궁, 궐 밖에 머물렀다. [[유교]]를 국교로 하려던 [[고려 성종|성종]]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에게도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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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량원군에 대한 박해 ===
아들이
천추태후가 볼 때 자신들의 구상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조카, 즉 동생과 왕욱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태어났던 그 아이였다.<ref name="chonch"/> 이미 나이도 10대 중반을 넘고 있었다. 권력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쥐고 있었지만 대의명분은 그 아이에게 있었다.<ref name="chonch"/> [[고려 현종|대량원군 순]]은 자신의 이종 조카가 되지만, 아버지 쪽으로는 사촌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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