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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는 공산(현재 대구)과 고창(현 안동)의 큰 두번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공산은 왕건의 대패, 고창은 견훤의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후로도 둘은 비슷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백제는 내부 균열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고려의 통일#고려의 통일〔槪說〕|고려의 통일〔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의 균형은 고창(古昌, 安東)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ref>
 
===후삼국후삼국의 통일===
{{본문|후삼국후삼국의 통일}}
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